허구와 진실이 부딪치며 빚어낸 매력‘자전소설’이라는 말만큼 어중간한 개념도 있을까. 소설이 시작되는 순간 자아는 글쓰는 주체일 뿐이다.
‘작가’란 기본적으로 개인성의 흔적만 남은 자,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또 하나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그것이 이 유구한 장르의 질긴 관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전소설을 즐긴다. 이중 부정을 즐기는 셈이다. ‘이것은 허구이다’와 ‘이것은 경험적 진실이다’가 서로 맞부딪쳐 빚어내는 묘한 긴장, 자전소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오, 아버지’(문학동네, 2001. 여름호)를 읽으며 누리게 되는 감동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하성란 문학의 어떤 내밀한 부분, 그녀의 작품들 사이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는 어떤 충동, 그 무의식의 심층을 탐사하는 한편, 또 다른 허구의 재미, 새롭게 조립된 또 다른 형태의 왜곡과 변형을 만나는 기쁨을 맛본다.
“두번째 아버지(하나님아버지-필자 주)는 일요일마다 근방의 모든 아이들을 불러모아 쿨에이드 가루를 탄 주스나 사탕, 시큼한 자두를 한 움큼씩 나누어주었다.
첫번째 아버지는 내게 비린 것을 좋아하는 식성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내가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시련을 적당히 던져주어 나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콤플렉스도 아버지 영향 때문이었다.”
작가가 소설 첫머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로 ‘오, 아버지’의 서사를 가동시키는 원동력은 “얼마 전까지 다니고 있던 회사에 돌연 사표를 던지고 안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얇은 일본 잡지나 ‘태양의 계절’ 같은 소설을 읽고” 있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세자매의 맏이이자 동네 제일가는 재주덩이 딸을 사랑한다. 딸 역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긴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동네 제일’인 딸은 대학을 가는 대신 타자급수시험을 보고 무역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무엇인가.
‘오, 아버지’는 이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탐문한다. 이 ‘아버지 찾기’의 과정이 손쉬울 리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방해하고 지연하는 또 다른 의식과 싸워야하는 작업이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는 매번 기억의 단절이 생긴다. 그 어둠을 뚫고 돌연 또 다른 기억이 끼워들기도 한다.
그 파편적인 기억들은 일견 서로 무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기억들은 ‘아버지’라는 ‘불빛’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간다는 점에서 서로 일관되어있다.
소설의 마지막, 우리는 연인과 함께 밀어를 나누다가 자신을 찾아온 딸을 보고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부지!”를 만난다.
오, 아버지. 그러나 이 모든 파국에도 불구하고 하성란의 아버지찾기는 환멸로 마감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서사를 종결시키는 것은 따뜻한 관조와 웃음섞인 비애다.
엄마나 다른 두 동생과 달리 그녀만이 아버지의 ‘비밀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신탁받은 자’였기 때문일까.
이 ‘무당’(맏딸)은 막내동생을 등에 업은 채 병약한 둘째의 걸음을 재촉해 새로운 아버지, 그녀의 말에 의하면 ‘두번째 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물론, 구원의 등불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우리는 구원의 징후를 느낀다. 아마도 그것의 이름은 ‘연민’인 듯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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