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가업을 이어 누룩 제조에 필생을 바쳐 온 아버지. 하지만 아들은 퀴퀴한 냄새 폴폴 나는 누룩 따위에 젊음의 열정을 바치기가 싫었다.장래성 없어 보이는 누룩장사 보다는 더 ‘큰 물’에서 꿈을 펼치고 싶었다. 결국 3대째 가업 잇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와는 딴 길을 찾아 방황했다. 그러던 젊은이가 지금은 ‘좋은 누룩(국ㆍ鞠)과 좋은 술(순ㆍ醇)을 만드는 집(당ㆍ堂)’의 주인으로변신했다.
국순당 배중호(裵重浩ㆍ48) 사장. 그에게 누룩은 질기디 질긴, 운명의 끈이다.
한 때 장래성이 없다며 누룩을 뿌리쳤던 그는 이제 ‘누룩 박사’로 통하는 아버지 배상면(裵商冕ㆍ78)씨 이상으로, 누룩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바로 그 은근하고 묵직한 누룩의 힘으로 주류업계의 ‘살아 있는 신화’로 떠오르고 있다.
‘생쌀 빚기’라는 독특한 전통 누룩 발효법으로 탄생한 ‘백세주’가 성공의 견인차다.
1994년 매출액 20억원 안팎의 소규모 ‘술도가’에 불과했던 국순당은 백세주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해마다 100%씩 초고속 신장을 거듭, 올해는 연매출 1,300억원을 바라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98년에는 국내 주류업체 가운데 처음으로 벤처기업 인증을 받았고, 지난 해 8월에는 벤처의 산실인 코스닥 등록까지 했다.
전통주 제조라는 ‘굴뚝산업’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부채비율 0%에 순이익 비율 25%로 코스닥에 등록한 어떤 정보통신(IT) 벤처 보다도 성장성과 부가가치가 높은 유망 벤처로 대우받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프랑스의 코냑,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바로 벤처기업 국순당이 도전하는 소프트웨어다.
대학(연세대 생화학과) 졸업 후 한 동안 무역 업계에서 ‘외도’하던 그는 80년대 초부터 ‘가업’에 복귀했다. 부친이 운영하던 누룩제조회사 배한산업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누룩 연구를 시작했다.
10여년 간의 연구 끝에 개발한 것이 문헌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무증자 발효법(생쌀 빚기)’. 종전처럼 쌀을 찌지 않고 생쌀을 가루로 만들어 누룩과 함께 버무린 뒤 물을 붓고 술을 빚는 방법이다.
‘숙취가 없고 뒤끝이 깨끗한 술’'보약반첩을 넣은 건강술’ ‘아내가 권하는 술’(주요 광고컨셉) 백세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배사장은 메이저 회사들이 간과하고 있는 틈새시장을 개척했다. 백세주 사진이 담긴 포스터와 메뉴판을 대량으로 제작, 서울 근교의 유원지 식당들을 훑고 다녔다.
건강술이라는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보신탕집도 주요 타깃으로 삼고 마케팅을 집중했다.
신문에 “보신탕을 당당히 먹읍시다”는 광고를 낸 뒤 외국정부나 종교단체 등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기존 주류 유통망을 통한 획일적인 마케팅 대신 직접 현장을 파고드는 ‘게릴라 마케팅’에 힘입어 백세주는 1,500억원대 국내 약주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를 굳혔다.
전통약주가 황금시장으로 떠오르자 올들어 진로나 두산 같은 주류 메이저들도 경쟁에가세했다.
전국적인 유통망과 마케팅 노하우를 축적한 대기업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데도 배 사장은 오히려 느긋하다. “술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리 전통주의 대중화를 위해선 반드시 대기업이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의의 경쟁자가 있어야 시장도 커지고, 기업의 발전도있는 거 아닙니까”
^주위에서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통하는 배 사장은 “회사 규모가 아무리 커져도 알코올 도수 20도 이상의 고도주는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취하기 보다는 즐기기 위한 술, 마시는 이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다.
▲국순당은 어떤 회사인가▲
국순당은 1970년 전남 순천에서 배중호 사장의 부친 배상면씨가 창업한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이후 ‘배한산업’으로 개명)’가 전신이다.
본래 대구가 고향이지만 주류의 공급구역 제한제도로 인해 면허를 받을 수 없었던 부친이 순천에서 누룩공장을 차린 것. 92년 구기자ㆍ오미자ㆍ인삼ㆍ황기 등 12가지 한약재를 넣어 빚은 13도짜리 전통 약주 ‘백세주’를 출시한 뒤 이듬해 국순당으로 사명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세주 하나로 94년 20억원, 95년 40억원, 96년 140억원, 98년 220억원, 99년 680억원, 2000년 1,100억원의 초고성 성장을 해왔다. 82년에는 무증자 현미주 제조법으로 특허를 취득했고 98년 벤처기업 인증에 이어 지난해 코스닥 벤처부문에 등록했다.
배중호 사장 집안은 3대째 술도가의 대를 잇고 있다. 배사장의 조부와 백부가 대구에서 술도가를 했고 부친은 대학(경북대 농예화학과)을 마치고 포항과 대구, 순천, 강릉에서 양조장을 했다.
동생인 영호(43)씨는 몇 년 전 국순당에서 분가해 전통주 제조업체 ‘배상면주가’를 차렸고, 여동생 혜정(45)씨는 탁주전문업체 ‘배혜정누룩도가’를 운영중이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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