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26일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4년생 이재호가 서울 한강 성심병원에서 운명했다.향년 21세. 이재호는 그보다 한달 전인 4월28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에서 서울대생들의 반미 시위를 이끌다 한 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해 전신 80% 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다.
이재호와 함께 분신한 같은 대학 미생물학과 4년생 김세진 역시 심한 화상을 입고 5월3일 고통 속에서 운명했다.
당시 김세진은 그 대학 자연대 학생회장이었고, 이재호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 산하의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다.
흔히 자민투라고 불렸던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운동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반제국주의보다는 반파쇼 투쟁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민민투(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 해 4월28일의 신림동 시위는 자민투에서 이끌었는데, 학생들이 그 때 내건 구호도 “반전 반핵 양키 고홈” “양키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 반대”였다.
자민투는 뒷날 NL(민족해방)이라고 불리게 될 운동노선의 씨앗이었고, 민민투는 CA(제헌의회) 또는 ND(민족민주)라고 불리게 될 운동 노선의 씨앗이었다.
반미 자주화를 중심에 둔 NL은 대중 노선을 추구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외세와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민족 구성원 다수를 운동의 주체로 설정했고, 반파쇼 민주화를 중심에 둔 CA는 선진 노동자들이 이끄는 전위당이 운동을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민족민주 운동사에서 외세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다.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군부를 미국이 거들면서, 한국인들 다수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벗이라는 오랜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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