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항쟁 이후 열한번째 맞는 5월은 길고 뜨거웠다. 1991년 5월25일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 부근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과 공안 통치 종식을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성균관대 불문과 4년생 김귀정이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숨졌다.25세였다.
김귀정의 죽음은 그 해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뒤 5월 내내 이어진 뜨거운 죽음들의 맨 뒷자리에 있었다.
그 두 죽음 사이에 전남대생 박승희, 안동대생 김영균, 경원대생 천세용,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 피혁 노동자 윤용하, 노동자 이정순, 전남 보성고교생 김철수, 노동자 정상순 등이 차례로 분신하거나 투신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한 달 사이에 열한 명의 꽃다운 목숨들이 진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그 해 5월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스스로도 확신 못하는 환상적 전망을 가지고 감히 누구를 지도하고 선동하려 하는가?"고 이들 죽음을 힐난했고, 사흘 뒤인 5월8일 전 서강대 총장 박홍은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배후에 분명히 죽음을 조종하는 선동세력이 있다"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에 화답하듯 검찰총장 정구영은 연이은 분신 자살을 부추기는 조직적 배후 세력이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전국 검찰에 내렸고, 당시 대통령 노태우 역시 민자당 대표 김영삼, 최고위원 박태준 등과의 오찬 회동에서 "일부 극력 세력이 학생과 노동자를 선동해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고 체제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며 이에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그 길고 뜨거운 5월은 김귀정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며 한 시대를 우울하게 감당하고 있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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