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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 詩의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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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 詩의 껍데기는 가라

입력
2001.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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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학평론가 데오도르 토인비는 "18세 때 나는 시가 단순히 남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장 콕토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세에는 시가 연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나는 시를, 갱도에 갇혀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 구해줄 동료를 고대하고 있는 광부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聖者)여야 합니다."이 말은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시에 대한 선호는 변한다는 것과, 그가 추구하는 시의 의미가 '기쁨'에서 '구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기쁨의 시'는 서정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고은 시인의 '미당 담론'(창작과비평, 여름호)은 양해의 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하나는 사십구재 이후에나 말하는 것이 덜 거북살스럽겠다는 생각이었고, 둘은 애도와 회고의 찬양들이 가라앉은 다음에나 담담하게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미당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사제관계'를 밝힌 후 결별하지 않을 수 없던 가치관ㆍ시국관의 차이와 미당의 시 자체에 대해 비판한다.

그 글은 때로는 민망하고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준열하고 정치하다. 그는 미당 시의 '으밀아밀하게 그늘진 밀어, 한여름날 담을 넘어가는 노련한 파충류와도 같은 언어 미각'을 감탄한다.

그러면서도 미당의 '언어기교 밖에는 볼품이 없는'시 '귀촉도'등과 전두환씨 생일 축시 '처음으로'의 파렴치성을 여지없이 공격한다.

미당 시를 높은 경지로 이끌고 있는 것이 그의 도저한 토속적 정서와 서정성일 것이다. 그러나 토인비처럼 시의 무게 중심을 서정에서 구원으로 옮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수영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고 한다. 하나는 미당의 토속성이 견딜 수 없고, 둘은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이유였다.

고은씨의 비판을 일방적 매도나 추문 들추기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은 공인으로서 미당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기에 무리가 없는 시기이다.

올 것이 온 셈이다. 가령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사후 이른 시기에 평가가 이뤄졌다면, 지금 기념관건립 문제를 놓고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인=선비'라는 관념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러나 미당의 비(非)선비적, 비지식인적 행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흔들림 없는 지위를 유지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시의 우수한 토속적 정서와 서정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혹한 독재체제 아래 주눅이 든 우리가 정치성을 배제한 미당의 시에 안주하고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탓은 아닐지. 우리의 정서가 탈정치적이고자 하는 소시민적 욕망에 젖어 있었다는 반증은 아닐까.

고은씨는 '미당의 언어는 정지용에 어느 만큼 빚지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도 지적하고 있다. 분단의 비극을 겪어 오고 있는 우리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시인에게 합당한 위상을 찾아주지 못한 채 긴 시간을 지내왔다.

정지용 이용악 등 북에서 활동함으로써 외면 당한 시인이 문학사에 복권된 것이 오래 전이 아니다. 김수영 신동엽처럼 일찍 타계함으로써 자주 거론되지 못한 시인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누가 더 평가돼야 할 시인인가를 묻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질문일 수도 있지만 준엄한 물음일 수도 있다.

냉전시대의 그림자가 걷혀가는 이제 많은 시인을 같은 지평에서 바라보고 자리매김하는 검증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에서 반사적 이익과 불이익으로 얼룩져 있는 정치의 색깔을, 껍데기를 벗겨내야 한다. 엄정한 기준을 세운다면 이런 논쟁과 시도는 헛되거나 소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학의 생산적 미래를 위해 필요한 진통이다.

박래부 편집국 부국장 겸 문화부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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