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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27)색목인 정 화의 남해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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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27)색목인 정 화의 남해원정

입력
200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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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으로부터 바다로 눈을 돌리게 한 15세기는 모든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백년이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바다를 선택할 기회를 한 번씩 준 것이다. 서양에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정 화(鄭 和 1370~1433?)가 있었다.

1492년 신대륙(?) 발견을 위해 떠난 콜럼버스의 함대는 고작 범선 3척과 승무원 120명으로 구성됐고 1498년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범선 4척, 승무원 170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보다 수 십년 전인 1405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출항 명령을 받은 정 화는 장병 2만7,800명을 62척의 대선에 분승시킨 대함대를 이끌고 수도 난징(南京)을 출발했다.

이후 28년간, 정 화는 모두 7차에 걸쳐 매번 비슷한 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가깝게는 인도 서해안, 멀리는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거리 총 10만 해리(약 18만5,000㎞)의 소위 '남해(南海)'원정을 감행했다.

그의 함대는 당시 세계 최대의 선단으로 '바다를 놀라게 한 거대 함대'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닐 정도였다.

그 규모나 항해거리, 들인 시간 그리고 쏟은 공력면에서 다른 두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대함에도 불구하고 정 화라는 이름은 그들 앞에만 서면 초라해진다.

난징의 서남쪽 니우서우산(牛首山) 자락에 있는 정 화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필자가 가지는 의문이다.

1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크게 뒤흔든 돌림병이 페스트라면, 15세기 초 유라시아 해양세계를 장기간 지배한 자가 바로 정 화였다.

이 둘 모두 공교롭게도 중국 서남 산악 오지인 윈난성(雲南省)에서 시작됐고, 몽골의 중국 지배가 낳은 산물이기도 했다.

페스트는 본래 윈난지방의 고유한 풍토병으로 이 지방을 지배한 몽골인들의 말 안장에 그 균을 보유한 벼룩이 기어 들어가 초원지대를 나오게 되었고, 14세기 전반 몽골제국의 대교역망을 통해 중국 동유럽 북미 서유럽 등지에 퍼져 급격한 인구감소와 사회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정 화는 원대 동서무역과 국가경제를 장악했던 색목인(色目人) 출신의 환관으로 원대 말엽에 태어났다. 몽골은 티베트고원 베트남 타이 미얀마 등과 중국의 스촨, 후난을 잇는 전략적 요충인 윈난의 지배를 위해 이곳에 이슬람 색목인을 대거 이주시켰던 것이다.

정 화의 가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몽골 지배 시기의 중국은 정크(Junk)교역의 최성기였다. 낙타 한마리는 고작 270㎏을 싣고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하지만, 8세기 후반 송대에 사용된 300톤급 다우(Dhow)선 1척은 600마리의 낙타가 싣는 짐과 500~600명의 선원을 실어나를 수가 있었다.

실크로드 대신 원제국과 우호적인 일한국을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최성기를 맞게 된 것은 당연하다. 정 화의 남해원정은 몽골시대가 바다에 일으킨 파동의 마지막 물결이었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명나라의 태조만큼 백성을 땅에 묶어 두려는 황제는 없었다. 전체 백성을 땅 위에 묶어두어야 왕조가 공고해진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었다.

명나라의 법률에는 누구든 외출할 때는 증명할 문건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의 정치는 이동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독특한 독재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쇄국주의 하에서 자유로운 통상에 대한 생각을 갖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토록 먼 항해 길을 떠났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그래서 이 원정을 명령한 영락제를 태조 주원장의 아들이라기보다 '쿠빌라이의 후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락제가 이처럼 튀는 행동을 감행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원장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 항해의 목적에 대해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명제국의 중화질서 구축의 연장이었지 몽골식 세계질서의 재건에 목적을 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끈 네 척의 작은 범선이 돈과 시장을 얻기 위해 인도양으로 왔고, 콜럼버스도 같은 목적으로 떠났다.

이에 비해 정 화의 함대는 전투, 탐험, 통상 등 실리를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 실은 이 함대는 중국 역대왕조가 항상 그랬듯이 여러 나라에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질서에 동참을 강요하는 사신들의 행차에 불과하였다.

함대 중심을 이루는 거함인 '보선(寶船)'은 각지의 지배자에게 주는 '황제의 하사품'과 각지의 지배자가 황제에게 헌상하는 '보물을 싣는 배'였다.

정 화의 함대가 중화제국 명나라의 위용을 바다의 세계에 과시한 것만은 사실이고, 어느 정도 중화질서를 구축한 것도 실적이라면 실적이다.

그러나 바다에 나갔다 할지라도 역시 육지에 집착하는 사상과 행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 명의 한계였고, 정 화에게 드리워진 숙명의 그늘이었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비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대규모의 항해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정복과 무역을 위해 인류를 부른다'고 하였는데 정화의 원정은 넓으신 중국 황제의 도량을 베푸는데 목적을 두었다.

정화의 혈관 속에는 상거래의 기재인 색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역시 '도리를 다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군자국(君子國)으로 환원한 명제국의 일개 신하의 신분일 뿐이었다.

바다를 알고 무역의 경쟁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을 수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정화가 6차 항해중이던 1421년 정월, 명은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그 해 4월 8일 신설된 베이징의 황궁 삼궁전(三宮殿)이 벼락을 맞아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의미를 묻는 영락제에게 한 신하는 중화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서양에 함대를 파견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 주장이 수용되어 남해 여러 나라를 향한 항해는 물론 북방민족과의 다마(茶馬)무역마저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정 화의 사망시기와 매장장소는 묘연하다. 1433년 인도 서해안 항구 캘리컷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고, 귀국해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정화는 35세 때에 함대를 이끌고 첫 항해에 나선 이후 그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63세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해상과 항해를 준비하면서 보냈다.

그가 만약 캘리컷에서 죽었다고 한다면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선단이 희망봉을 거쳐 이 항구에 이르기 65년 전의 일이다.

몽골시대가 열었던 항해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장식한 인물 정 화는 세상을 떠나고 소위 '대항해시대'를 개척한 새로운 인물이 대신 같은 항구를 찾은 것이다.

먼저 해양제국을 열 기회를 얻은 중국보다 늦었지만 실속있게 대처한 서양이 이후의 수세기를 주도한 것은 당연했다.

정 화의 남해원정이 끝난 후 명나라는 줄곧 북방세력과의 대치가 주종을 이루었고 동남해안선은 오랫동안 적막 속에 잠들게 되었다.

정 화가 이토록 초라한 것은 정 화의 잘못이 아니라 명제국 질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제국은 정 화의 신체의 일부를 잘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꿈마저 이렇게 빼앗아 갔던 것이다.

박한제·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색목인

흔히 색목인(色目人)이라면 '눈이 파란 사람'으로 해석을 한다. 그래서 서양인을 일컫는 말로들 알고 있다.

그러나 박한제 교수는 한자 색목인에서 목자는 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 각양 각색'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물목(物目)이라는 단어의 쓰임새처럼. 그리고 색목인이라고 불린 서역인들은 대개 페르시아계 이슬람들로 절대로 눈이 파랗지도 않다고 한다.

역사에세이팀이 다닌 곳 가운데 색목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페르시아와 아랍, 투르크, 중국, 러시아의 영향까지 두루 받은 이곳에서 푸른 눈은 보기 힘들다.

이곳에서 만난 전형적인 이란계 청년 아민(23)은 "양미간이나 얼굴 표정으로 우즈베크인과 이란계를 구분할 수 있지 눈 색깔은 아니다"고 했다.

갈색눈의 서역인들이 색목인으로 불린 것은 몽골 대제국의 엄격한 신분차별 때문이다.

쿠빌라이 대칸은 대도(지금의 베이징ㆍ北京)에 도읍을 정하고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했지만 그로부터 8년 뒤인 1279년에야 남송을 멸하고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몽골은 저항한 순서대로 민족을 차별했다. 최후까지 저항한 남인(南人ㆍ남송 치하의 주민)을 가장 아래에 두었으며 그 다음 한인(漢人), 색목인 몽고인 순으로 우대했다.

고려인은 한인에 포함됐다. 이 같은 차별 정책에 따라 민족별로 참여할 수 있는 업무영역도 제한이 돼있었다.

정벌에 동참한 색목인은 몽골인만큼이나 관직 참여도가 높았고 재정 상거래 등의 다양한 업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생긴 단어가 바로 색목인이다.

이 와중에 가장 차별을 받은 남인들은 한인보다 세금도 더 많이 냈고 출세에서도 지장이 많았다.

사회적으로도 만자(蠻子ㆍ야만인의 자식)라 하여 홀대를 받았다. 이 같은 차별에 남인들은 반란을 많이 일으켰으며 주원장도 옛 남송 지역을 근거로 명을 세웠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색목인'들. 몽골대제국에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은 명나라가 들어서자 신분이 격하됐다. 정화는 색목인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환관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박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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