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무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국 TV 중계를 보다가 흥미로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종반 무렵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가운데 두 기사 모두 마지막 1분 초읽기에 몰려 있는 상황. 이제부터는 상대방이 착수한 후 1분 이내에 돌을 놓지 않으면 무조건 제한 시간 초과에 의한 반칙패를 당하게 된다.이 3단이 열심히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던 중 이 9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 오려는 모양이다. 이 3단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인 채 바둑판만 뚫어지라 들여다 보다가 기록자가 "하나 둘 셋"하고 초를 읽기 시작하자 서둘러 바둑판에 돌을 놓았다.
여기까지야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데 문제는 아직 이창호 9단이 자리에 돌아 오지 않았다는 것. "어,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상대가 착수를 했으니 이제부터 1분 안에 이 9단이 착수를 못 하면 시간패를 당하게 될 텐데. 시계 바늘은 째깍째깍 돌아 가고 함께 관전하던 친구들은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곧바로 이 9단이 자리에 착석, 응수를 함으로써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일 이 9단이 1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아 한국기원 바둑 규칙을 찾아 본다 어쩐다 부산을 떨었지만 어디서도 정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며칠 후 조훈현 9단을 만나 물어 보았더니 정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즉 상대가 착수하기 전에 생리 현상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면 중간에 상대가 착수했다 하더라도 초읽기를 일단 보류하고 대국자가 자리에 돌아 온 후부터 초읽기를 시작한다는 것. 반대로 일단 상대가 착수한 후에는 대국자가 자리를 비우건 말건 상관없이 무조건 초읽기를 시작하므로 현실적으로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 이 9단이 조금 늦게 돌아 왔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규정은 이른바 관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대국자가 이를 악용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만일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 난다면? 아예 '초읽기 도중 생리 현상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은 최장 몇 분까지 허용된다'는 식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그러자 조 9단은 "물론 악용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각자 양심에 맡겨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바둑이 세계화를 지향한다면서 계속 관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골프나 야구처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보다 상세히 명문화된 대국 규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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