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재계가 '위험한 게임'에 들어갔다. "대기업 규제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부총리의 말을 받아 재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우성을 치면서 봇물이 터지듯 본격화한 게임이다.표면상 시발점이 된 부총리의 운(韻) 띄우기와 재계의 벌떼 공세 막후에 어떤 끈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여하튼 지난 수년간 터부시됐던 재벌 정책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단 며칠의 소용돌이를 거쳐 당당하게 국정의 '도마'위에 오르게 된 것은 놀라운 변화다.
이것만으로도 재계에는 커다란 수확이다. 재벌정책에서 소위 '과도한 규제'를 풀기 위한 민관합동 태스크 포스까지 만들어질 예정이니 이제 남은 것은 재계가 챙길 보따리의 크기를 정하는 일 뿐이다.
이것은 사실 정부와 재계 어느 측도 국민에게 내세울 명분이 약한 게임이다. 우선 정부가 그간의 전선에서 후퇴해 '빈틈'을 두어도 될 만큼 재벌정책이 든든하게 뿌리를 내린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재계 역시 그들이 국민 앞에 선서한 이른바 '5+3 원칙'을 얼마나 신의와 성실로 이행했는지 짚어봐야 한다.
이에 대한 국민 정서와 내외의 평가는 알다시피 냉소적이다. 문어발식 다각화와 순환출자, 금융자원의 독식 등 환란 이후 내려갔던 재벌의 불건전성 지표들이 어느새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재벌정책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재계나 정부의 '경기 타령'은 소도 웃을 일이다. 물론 재벌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절박한 사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벌 규제정책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고 환란 이후 지금보다 어려운 와중에서도 지켰던 것이다.
재벌 규제정책 때문에 국가경제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작년 재작년의 고성장- 고수출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미스터리다.
어설픈 구조조정과 해외경제 변동으로 어려워진 나라 경제를 재벌정책 완화조치로 풀겠다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둑'이 무너지는 것이다. 정부는 재벌정책의 기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규제를 푼다고 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둑에 일단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재계는 목하 세금 인하, 헌법 개정의 필요성까지 제기하며 총공세의 나팔을 불어대고 있는 중이다.
출자총액제한의 예외 확대, 부채비율 제한의 예외 인정 등 정부가 이미 언명한 것들만 해도 근간(根幹)에 금이 가는 소리다.
주요 선거일정이 다가오고 있는 정권 후반기에 주요 정책, 그것도 재벌정책을 역류시키는 것은 스스로 의혹을 자초하는 일이다.
국민경제의 미래 청사진과는 무관하게 정권과 재벌이 그야말로 '둘만의 상생'을 위한 대타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이런 오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에 걸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이번 게임에서 재벌로부터 분명한 반대급부를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적어도 경영의 투명성과 의사결정의 민주화에 관한 대목에서 만큼은 공세적 전리품을 거두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번 게임은 정말 위험한 게임이 될 것이다. 재계나 정부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경제에 위험하다는 얘기다.
재계는 이번 게임의 시작과 함께 이미 승자의 계단에 올랐으며, 정부(관료와 정치인)는 원래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는 법이 없다.
재벌은 이번에 손에 잡히는 실체적 이득이 생기지만, 그것이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에도 플러스가 될지는 미지수다. 재벌의 시장지배력이 커질 때 무수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좌절감도 함께 커질 것이다.
정부는 불과 몇 년 만에 환란의 뿌리와 교훈을 경시하는 자만심에 빠지고 있다.
송태권 논설위원 songt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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