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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이태영선생 부름에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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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이태영선생 부름에 28년…

입력
2001.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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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내 나이 열 살 무렵의 일이다. 이 땅의 첫 여성 변호사인 고 이태영(李兌榮) 선생께서 '법률구조'라는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 말이다.그 때 어린 여자 아이는 자신이 커서 상담소의 작은 방에서 상담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이태영 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책임자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방송 PD로 잠시 일한 후 1973년 상담소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화여대 법정대학 시절 나는 학생회 일을 했고 이태영 선생은 내가 속한 단과대학의 학장이었기 때문에 뵐 기회가 많았다.

그때부터 나를 눈여겨 보았던 선생님께서는 그후 내게 "너가 일할 곳은 바로 여기"라며 굳이 불러주셨고 나는 별 주저함없이 응했던 것이다.

그 부르심에 따른 것이 이렇듯 내 인생을 결정지으리라고는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상담소의 작은 방에서 상담위원으로, 또 부소장으로 28년을 보내고 지난해 3월 16일 이태영 소장과 2대 김흥한(金興漢) 소장의 뒤를 이어 상담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소장이 된 그 날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새로운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장 무거운 책임이 내게 주어진 날이어서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비록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됐지만, 그동안 소장으로 활동한 이태영 선생님이나 그분의 큰 사위로 소장이 된 김흥한 변호사에 비하면 나는 겨우 54세의 '젊은' 소장이었기 때문에 상담소의 무게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더욱이 실무자 출신의 첫 소장으로, 명망가도 아니어서 제대로 상담소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나 스스로의 업무능력에 대한 회의보다는 그런 고민이 솔직히 더 많았다.

하지만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 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이제는 명실상부한 공적 기관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사실은 거역할 수 없었다.

가정문제, 그리고 그와 밀접한 연장선에 놓인 가족법을 연구, 검토하며 미흡한 부분에 대해 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임무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자리가 상담소의 3대 소장 취임식이었던 것이다.

곽배희·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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