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요."내가 따뜻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주먹을 쥐고 납인두를 들던 당신의 손을 만난 지 세 시간도 채 못 되어 꼭 쥐었습니다. 나는 전기기술자였고 당신은 전자회사 검사원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마로니에공원 찻집에서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나는 그 때 여의도 태영유진 빌딩(지금 SBS 방송사) 신축현장의 전기기사였는데 당신과 나는 한강변을 거닐면서 '몰래데이트'를 하였습니다. 양화진 저편 서편 하늘에 붉은 노을이 타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는 일이다.' , '사랑이란 서로의 불타는 열정을 하나로 녹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빛을 향해 서로가 서로의 불빛이 되는 일이다.'
어쭙잖은 사랑론이지만 제법 그럴 듯한 논리를 세워 세상의 남녀관계로부터 우리들의 만남과 사랑을 무엇인가 각별한(?) 것인 양 치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난 후 안 일이지만 당신이 내게 들려준 그 날의 나에 대한 첫 인상은 참으로 기발하고 유쾌한 것이었습니다. 날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가사용'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요.
만나자마자 '요리하는 남자', '빨래하는 남자'를 생각한 것이겠지요. 애 낳는 남편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젖 물리는 일을 해보겠습니다"라고 내가 당신을 놀리곤 했지요.
이제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네요. 이렇게 감회에 젖는 것은 그동안 우리들의 삶이 큰 격랑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을 떠나 보낸 대신 귀여운 세 아이들을 맞아들였고 일당 몇 천 원의 펜치쟁이였던 나는 의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제 웬만한 고통과 아픔의 기억조차 적당한 아름다움과 추억이 되었습니다만 참 험한 길을 잘도 걸어왔구나 생각합니다.
그동안 참고 견디면서 나를 도와준 당신에게 진정으로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무엇보다도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당신은 "김영환의 아내"로 불려지는 것을 비각(상극)처럼 생각해 왔지요.
당신이 그동안 지역에서 문화기획자로 활동한 것을 토대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것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우리들의 거울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지난 시절 나의 건강한 비판자가 되어왔듯이 말입니다.
내가 요즘 느끼는 문제는 아이들과 나 사이의 단절감입니다. TV프로그램부터, 좋아하는 음악 등 관심있는 일 중 한 가지도 공감대가 없지 않나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나와 하늘이 사이에 god가 있습니다. 내가 사다 준 T셔츠는 어디 가고 god가 선전하는 T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솔직히 심통이 납니다.
어젯밤에도 한결이는 그 맛있는 짜파게티를 끓여 먹으면서, 아 글쎄 옆에서 침을 삼키는 아빠에게 "아빠 좀 들어 보세요" 라고 한 마디도 않더군요. 정말이지 그 말을 들었다 해도 저는 한 젓가락도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건 진심입니다.
김영환 과기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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