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고 볶으며 달려 온 40년오옥자(吳玉子ㆍ56ㆍ서울 성북구 정릉 2동)
가위와 롯드(파마기구)를 거머쥐고 허덕여 온 삶의 노정을 뒤돌아 봅니다. 미용사하면 여인의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멋쟁이로 인식하기 쉽지요. 그건 속 모르는 얘기입니다. 미용사란 직업만큼 호된 노동도 흔치 않아요.
막장에서 얼굴에 검댕 칠하고 일하는 광부의 중노동과 다를 바 없고, 작두 위에서 맨발로 뛰는 무녀의 묘기만큼이나 진땀 나는 직업이 바로 미용사이지요.
저는 신혼 시절 미아리고개 판자촌 단칸 사글세방에서 임신한 몸으로 일주일 간을 소금물에 수제비를 끓여 허기를 견뎌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고통스럽던 가난이 평생 생활력을 채찍질해주는 것 같아요. 가난을 모면하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내 능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아침 7시부터 밤 9시가 넘도록 예고 없이 찾아주는 손님을 기다리노라면 어느 땐 지루한 고문을 당하는 기분도 들어요.
남들이 쇼핑을 가고 등산을 갈 땐 조바심이 나기도 하죠. 일에 발목 잡혀 자유를 박탈당하는 삶에 때론 서러워지죠.
저의 일터는 번화가가 아닌 외진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요. 얼마 전 이사와 뿌리내렸죠. 동네 여인들의 사랑방 구실도 하고, 울고 웃는 이웃들의 풋풋한 인심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일할 수도 있지요.
요즘은 여성들의 개성과 취향이 원체 유별스럽고 유행이 자주 바뀌는 통에 일하기 더욱 힘들어졌어요.
성미가 깐깐하거나 조급한 손님을 대할 때면 뒷목이 경직될 만큼 긴장이 되죠. 40년 가까이 부려먹은 제 육신도 이제 기능이 쇠퇴하나 봐요.
가위를 쥔 손아귀가 시척지근해지고 헤어드라이기를 휘두르는 동작이 어눌해져요. 파마를 할 때는 60~70여 개의 롯드를 말고 오일과 영양크림, 중화제를 번갈아 바르죠. 머리칼 한 올 한 올 독한 파마약을 칠할 땐 시력 약해진 두 눈에선 눈물이 비오듯 흐르죠.
버팀목처럼 세워 둔 두 다리에선 쥐가 나고 발등은 찐빵처럼 부어오르고..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봅니다. 눈가 주름이 더욱 깊고 선명해졌군요. 어느새 이순(耳順)의 문턱에 다다랐군요.
제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이랍니다. 해방 후 생후 1개월 된 저를 어머니가 목화솜에 싸안고 내려오셨대요. 눈자라기 핏덩이가 생존의 고난을 일찍 경험한 셈이죠.
가족을 지키겠다고 고생하신 아버지는 그때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진학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광주리 행상으로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때 배우기 시작한 미용기술이 제 평생의 생계 수단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1968년 12월 27일.
청량리 대왕코너의 예식부에서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신랑이 스물 일곱, 제가 스물넷이었죠. 혼사를 성사시킨 사람은 친정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사근사근한 사윗감의 성격에 반해 정말 중요한 조건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피난민 가정의 6남매 중 넷째인 제 남편은 겉모습은 명동 멋쟁이 부럽지 않았지만 진취력과 끈기가 없어서 실속이 부실했던 겁니다.
결혼 7일째 시댁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습니다. 결혼 예물로 받은 서 돈짜리 금반지와 서 돈 반짜리 금목걸이를 고스란히 압수당한 겁니다. 큰 동서의 패물을 잠시 빌렸던 것이죠.
목걸이를 풀고 반지를 뽑아 반납할 때의 비릿한 모욕감은 아직도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답니다.
첫 인상부터 흐려놓은 시집은 첫 아이(아들 섭이)를 낳자마자 더욱 치명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친정에서 해산을 하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죠.
난데없이 제가 쓰던 장롱과 세간이 친정집으로 옮겨져 오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미아리고개 꼬방동네에서 신접살림을 꾸려가던 저희 내외의 사글세방 보증금을 시어머니가 몽땅 갈취해간 겁니다.
아마 벼룩의 간을 빼 간다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전 밤낮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젖을 먹겠다고 작은 입술을 달막거리는 어린 생명을 보면 눈앞이 더 깜깜했습니다.
7일째 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몸조리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생후 일주일 된 갓난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저는 미용재료상회를 찾아 구직을 의뢰했습니다.
자격증이 있어서 선걸음에 일자리가 나타나더군요. 소개받은 곳이 '미아리 창녀촌의 ○○미용실'. 다급한 처지에 가릴 경황이 없었죠. 미용실 분위기는 난잡했습니다.
담배연기 섞인 역한 향수 냄새, 거침없이 내뱉는 음담패설! 전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머리, 피부, 손과 발톱 손질에만 마음을 집중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길에 나서면 도로의 자동차며 거리의 사람들이 제다 머리에 뿔돋은 괴물로 둔갑돼 꿈틀거렸습니다.
영양결핍과 현기증으로 헛보였던 겁니다. 젖은 불어 겨드랑이까지 켕기고 아침에 신고 나온 신발은 발끝에 걸리지도 않았어요.
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맞은 더덕북어 꼴을 하고도 지남철에 끌리는 쇳조각처럼 허겁지겁 어린 것을 향하는 발걸음은 스스로도 신기했습니다. 진종일 배를 곯다 지쳐 잠든 어린 것에게 퉁퉁 불은 젖을 물리노라면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1970년 봄.
마침내 제 이름 석자로 사업자 등록을 내서 개업했습니다. 낮은 지붕이 게딱지처럼 밀집해 있는 삼양동 큰 길가! '현주 머리방'이란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네 평 넓이의 가게에 두 평 남짓한 방도 딸려 있어서 아이 곁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게 더더욱 기뻤습니다.
보증금 12만 원에 월세 1만 4,000원인 가게를 얻기 위해, 2년간 고용살이로 모은 돈으로도 모자라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 가게 벽에 페인트칠을 해 주고 벽지를 바르며 남편 역시 기뻐했지요.
도로변의 포플러 잎사귀들이 훈풍에 하늘거리며 가게 창문을 기웃거릴 때면 제 가슴은 마구 설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빚도 갚고 내 집도 장만하겠다는 생각으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단골 확보를 위해 손님을 대하면 먼저 기도부터 했습니다. 종교는 없었지만 하늘에 비는 마음은 나름대로 경건했지요.
모든 손님의 머리를 만질 땐 손끝에 혼과 열정을 불어넣어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마치 도공이 도자기를 굽는 심정으로.
혼자 살림을 꾸리고 애를 기르며 전문 직업을 끌고 나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머리카락 섞인 음식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고, 아이의 배설물에서조차 머리카락 나오기가 일쑤였죠.
장마비가 줄기차게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플라스틱 물병을 빨며 놀던 아이가 문지방에 손을 헛짚어 가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하필 손님이 벗어둔 샌들의 코르크 뒷굽 모서리에 이마를 정통으로 찧은 겁니다. 찔레순 같이 연한 어린 것의 이마에 상처가 패이고 선홍빛 핏방울이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허겁지겁 수건으로 상처를 틀어막은 채 아이를 안고 병원을 향해 미친 듯이 빗속을 뛰었죠. 버스 한 정거장 거리가 그때처럼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응급치료를 하고 집에 와서야 빗물핏물로 얼룩진 제 흰 가운이 눈에 띄더군요. 파마 손님 머리에 중화제를 바르다 당한 일이어서, 1시간 이상 방치된 손님의 머리는 마치 센 불에 바삭 오그라든 오징어 발 같았죠.
개업 3년 만에 저는 빚을 다 갚고도 월세를 전세로 돌릴 정도로 사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남들이 쉬는 일요일도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한달 내내 깎고 볶는 일에 열중하고 얻는 수입은 평균 10여 만 원! 당시 일반공무원의 월급 4~5배였으니 여자벌이치곤 제법 괜찮았던 셈이지요.
저는 하루 번 돈을 다락모퉁이의 오지단지 속에 꼬박꼬박 숨겨 모았습니다. 단골손님들이 헛걸음치지 않기 위해 은행 갈 시간까지도 절약한 겁니다.
둘째를 낳고 백일 무렵이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다며 자주 집을 비우던 남편은 한 달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수소문을 해 찾아가 보니 새 여자한테 빠졌더군요.
신당동 주택지에서 젊고 고운 미망인과 새 살림을 차린 겁니다. 일에 묻혀 꾀죄죄한 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남편의 첩은 말쑥하고 예쁘더군요.
가구도 사람도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봐서 제법 여유있는 복 많은 과부인 듯 싶었어요. 한창 둘이 정분이 깊어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남편은 항의하는 제게 폭력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그때 두들겨 맞아 터진 저의 아랫입술은 지금까지 그 흉터가 뚜렷하게 불거져 있습니다.
그때부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좁은 가게 안을 안절부절했습니다.
생각다못한 저는 세 살 난 큰 애와 백일이 지난 둘째를 남편과 첩에게 떠맡기고 혼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가게 문만은 닫을 수가 없더군요.
자꾸만 미아리 판자촌의 단칸 월셋방에서 굶주릴 때의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깊은 밤, 빈 방에 홀로 누우면 가슴속에선 서릿발보다 더 시린 바람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악이 받쳤는지 두 아들을 생각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거에요.
모질게 마음먹고 버틴 지 한 달 후 남편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젖먹이를 해외로 입양시킨다는 겁니다. 비정한 부성애에 놀란 저는 허겁지겁 달려가 젖먹이를 찾아 안고 왔습니다.
한 달 간 어미 품을 떠났던 어린 것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눈 언저리가 해골처럼 움푹 패이고 기진맥진해서 울음소리조차 모깃소리 같은 거에요. 허기진 상태에서 정신없이 어미젖을 빨아 먹은 어린 것은 그대로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지쳐 잠든 어린 것을 들여다보노라니 말랐던 눈물줄기가 사정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어오른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손님머리를 하고 있는데 살며시 문을 열고 "엄마"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큰 아이였습니다.
세 모자만 두고 다시 새 여자 곁으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전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바라만 봤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전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두 아이의 아비로서 책임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과 더 이상 가족으로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혼을 하면 제 마음만은 홀가분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두 아들이었죠. 밑동이 절반 이상 잘려 나간 나무등걸에 매달린 위태로운 곁가지 격인 두 아들의 처지가 걸림돌이었던 겁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2년 남짓 만에 돌아온 그는, 순수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얼굴을 대하면 마치 빈 껍질을 보는 것 같았어요. 웃음도 가짜 같고 말소리도 가짜 같았죠. 제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들은 어수선한 가정환경 속에서 무병하고 밝게 자라주었습니다. 성격이 쾌활하고 원만한 큰 아이는 제 동생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제 입에 음식을 넣다 말고 동생 입에 넣어줄 만큼 의리가 있었고, 작은 아이는 그런 형을 몹시 따랐습니다.
자랄수록 우애가 깊어지는 두 아이를 보며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미가 없어도 서로 의지하고 잘 커줄 것 같다고.
가로수 단풍이 우수수 지는 어느 스산한 밤. 저는 수면제 70알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음독 3일 만에 병원응급실에서 깨어났습니다.
장 세척용 물주전자가 잔뜩 놓여있는 옆 자리에서 어미를 잡고 울고 있는 큰 애가 맨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그 무렵 전 살아온 세월이 서럽고 앞길도 멀게만 여겨져 자꾸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혼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죽는 편이 나을 듯 싶어서 수없이 죽음을 생각한 겁니다.
스물다섯 차례나 죽음을 각오했지만 뜻은 이룰 수 없었죠. 어느새 철이 든 큰 아이는 엄마의 자살 기도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죽으면 우리집은 끝장이니 동생도 나도 같이 죽을 거야." 엄마를 부둥켜 안고 서럽게 울며 따지는 아이의 따끔한 항변에 뜨끔했습니다.
그로부터 전 죽음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렸습니다. 죽으려는 모진 결심을 삶의 노력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가게 분위기부터 바꿨습니다. 새 벽지로 단장하고, 헌 가운도 눈부실 정도로 하얀 새 걸로 바꿨습니다.
1984년 가을.
꿈에도 그리던 내 집을 장만했습니다. 대지가 31평에 가게가 딸린, 당시 시가 270만원짜리 단독주택이었죠. 집 살 때 도움을 주신 분은 단골손님이었습니다.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며 그분은 제게 집값을 시가보다 30만원씩이나 덜 받고 넘겨준 겁니다.
이사하던 날 두 아들은 신이 나서 야단이었습니다. 공부방이 생겼다고 밤늦도록 불을 켜 놓고 책상을 정리하며 잠도 안자고 도란거렸습니다.
겉돌던 남편도 모처럼 맘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악운이 닥쳤습니다. 남편이 유치장에 갇힌 겁니다. 한창 사우디산업 바람이 불던 때였는데 인력브로커들의 심부름을 잘못한 남편이 사기죄를 덤터기쓴 거였죠.
전 가게 문을 닫아 걸고 남편 누명을 벗기겠다고 나섰습니다. 가게 문을 며칠씩이나 닫은 건 그때가 처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웃 100명한테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써서 억울함을 법에 호소했습니다. 석 달 만에 남편은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지요.
그날 집안은 온통 경사 분위기였습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불고기와 애들이 잘 먹는 오징어 튀김을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푸짐한 잔칫상을 나눈 겁니다. 먹구름 사이로 비친 한줄기 햇살이 더 눈부시듯 오랜만에 함께 누리는 행복의 기쁨은 컸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너질 뻔한 저희 가정을 붙잡아준 건 두 아들인 것 같아요. 가난과 부부의 불화로 어두웠던 순간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게 해 준 건 바로 아이들이었습니다.
가난을 이기게 한 것도, 자살 충동에 얽매인 어미의 번민을 바로잡아준 것도, 이혼장의 마지막 도장을 막아준 것도, 옆길로 빠진 제 남편의 방탕을 잡아준 것도 다름아닌 두 아들의 힘이었습니다.
동생의 장딴지에 매를 내리치면 어느 틈엔가 달려들어 대신 맞아주던 큰 아이! 지금은 가정의 기둥뿐이 아니라 버젓한 민중의 지팡이로 우뚝 서서 이 어미 맘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경찰대학의 마지막 연수를 마치고 경찰 마크를 달던 날의 가슴 설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온 제 삶. 지금은 여든을 넘긴 친정어머니를 뒷바라지하며 곁에 남편도 건재하니 이만하면 제 삶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죠! 제 나이 이순의 문턱에 다다랐지만 미용사라는 일에 대한 욕심을 떨구지 못하는 건 저 봄하늘처럼 푸른 소망이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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