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업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관료 및 기업인을 촌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먼저 프랑스.'그러고도 나라가 잘 돌아가는 것이 놀랍다'는 평가다. 일은 대충 하면서, 식사는 두 시간 넘게 즐기는 것에 질렸다는 것이다.
아침 7시 반이면 관공서 일을 시작하고 소시지만으로 10분이면 식사를 끝내는 독일인에게는, 사랑과 음식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듯한 프랑스인들이 한심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다.
다음은 이탈리아.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는 혹평이다. 수시로 바뀌는 정부는 부패 무능하고, 관료와 기업은 따로 놀고, 공권력을 비웃는 마피아가 판을 치고, 국민은 저마다 제멋대로인 나라를 규율과 질서가 몸에 밴 독일인들은 외계 세상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 평가대로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주축 멤버가운데 골치 아픈 존재다. 재정 건전성과 복지 수준 등이 EU 기준에 미치지 못해 경제사회 통합에 걸림돌이 되기 일쑤다.
인구 5,000만이 넘는 핵심 국가가 이 모양이니, 체제이념 차이로 딴지를 거는 영국과는 다른 차원에서 밉상이다.
이런 이탈리아가 며칠 전 총선에서 한층 큰 일을 저질렀다. 주요 회원국 정부를 좌파가 장악한 상황에서 우파 정권을 선택한 것이다.
그게 무슨 큰 일이냐고 할지 모르나, 주요 회원국의 경제사회 정책이 좌에서 우로 돌아서면 EU 단일 정책 결정이 어려울 게 뻔한 노릇이다.
유럽의 표면적 우려는 과격 민족주의 세력과 네오 파시스트 정당이 우파 연정에 가담한 때문이다.
그러나 속내는 이탈리아에서 2ㆍ3위를 다투는 재벌 총수가 정권을 거머쥐고, 유럽의 이념적 지향과는 다른 정책을 추진할 것이 못 마땅한 것이다.
그는 원래 마피아 결탁설이 파다하고, 돈세탁과 탈세 등 여러 범죄혐의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유럽 언론이 총선에 앞서 '범죄자가 집권해선 안 된다'며 베를루스코니 때리기에 열을 올린 바탕은 우파 이념의 오염과 득세를 꺼린 탓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탈리아 국민이 베를루스코니를 택한 것은 2차대전 이후 거의 줄곳 집권한 좌파의 방만한 국정 운영에 신물 난 때문이다.
특히 세계화와 경제구조 개혁물결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시장 혁명'을 약속한 재벌 총수에 기울게 했다는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성장을 위한 세금감면, 은행 구조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등 부시 미 공화당 정부의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그는 기업 이익을 지키기 위한 미국의 기후협약 탈퇴와 미사일방어 구상도 지지하면서, '미국의 최대 우방'을 지향한다고 공언했다. 하나같이 유럽연합의 노선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은 금물이다. 베를루스코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유럽의 이념적 지향이 바뀌고 있다'는 따위의 해석이 나올 것을 경계해서다.
흔히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논할 때 유럽마저 미국과 한 통속으로 묶어 '서구 선진국은.'이라고 왜곡하는 보수 논객들이 재벌 규제완화를 비롯한 경제정책 논쟁에서 이탈리아를 들먹일 법 하다. 그러나 이는 역시 유럽의 현실을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기본적으로 유럽식 사회주의가 체제의 근간이다. 역사가 오랜 나라가 그렇듯이 국가의 권위를 거부하는 세력이 많지만, 경제 사회적 견제와 균형 장치는 우리와 비할 바 아니다.
사회 보장 등 복지 수준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를테면 하이에크식 시장의 자유에 필수 전제 조건인 케인즈식 국가의 규제가 확고하다. 그러고도 세계 6번째 경제력을 유지하고, 미국과 독일에 버금가는 세계화를 진척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좌파의 실패를 틈타 집권했지만, 이탈리아가 '재벌의 포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그가 곧 망할 듯 하면서도 번성하는 이탈리아의 저력, 그 견제와 균형의 틀에 이내 적응할 것이란 예상이다. 그게 유럽과 미국의 차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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