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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천년] (26)동서를 이어준 사람들-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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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천년] (26)동서를 이어준 사람들-마르코 폴로

입력
200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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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7일 밤, 중국 베이징(北京) 교외 루거우차오(盧溝橋)라는 다리 근처에서 한 발의 총성이 터져나왔다.이것이 바로 일본 대륙침공의 신호탄이 된 소위 '노구교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내몽골 상도(上都) 여행의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피곤한 몸으로 이 역사의 현장을 찾은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 다리는 서양인들에게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이 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록이 나온다.

"그 도시(캄발룩ㆍ지금의 베이징)를 떠나 10마일쯤 가면 풀리상긴이라 불리는 커다란 강을 만나게 된다...이 강 위에는 매우 아름다운 돌다리가 하나 있는데, 여러분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 아니 그것에 버금갈 만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길이는 거의 300보이고 폭은 8보이어서, 10명의 기병들이 나란히 서서 갈 수 있다.

잘 다듬어진 회색 대리석으로 기초가 잘 세워져 있고, 다리 양쪽에는 대리석으로 된 난간과 기둥들이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다리 시작 부분에 대리석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기둥 아래에는 대리석으로 된 사자 한 마리가 있으며, 그 기둥 위에 또 한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매우 아름답고 크며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본 루거우차오는 정말 700년 전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그대로였다.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기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보고 듣고 또 체험했던 갖가지 진기한 이야기들을 글로 남긴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마르코 폴로만큼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마르코 폴로의 글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고 거기에 실린 내용들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으며, 특히 유럽에 활자술이 도입되면서 그의 글은 인쇄본으로 출간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로 손꼽힐 정도가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 경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출생하기도 전에 그의 부친 니콜로는 동생 마페오와 함께 동방무역을 위해 이미 고향을 떠났었고, 그가 아버지를 다시 본 것은 15살 되던 해인 1269년이었다.

이때 잠시 베네치아에 들른 그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마르코까지 데리고 다시 동방으로 향한 것이다.

당시 이들이 매료되었던 세계는 다름아닌 몽골제국, 특히 쿠빌라이라는 대칸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이었다.

마르코 폴로 자신의 말을 믿는다면 그는 이 위대한 군주를 위해 17년 동안이나 봉사하면서 중국 각지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던 이들 폴로 일가는 마침내 쿠빌라이로부터 귀국의 윤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중국남부의 취엔저우(泉州)항을 출발하여 인도양을 가로질러 1294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몇 년 뒤 마르코 폴로는 지중해에서 벌어진 제노아와의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제노아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거기서 우연히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난다.

그는 옥중에서 마르코 폴로가 놀라운 견문을 구술하는 것을 받아적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을 빚어낸 이후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든 이교도든 혹은 타타르든 인도인이든 아니 어떤 종족에 속한 인간이든 간에"자기만큼 여러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 없었다는 마르코 폴로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글에 묘사된 세계가 당시 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파천황의 신세계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조금만 읽어보면 누구나 이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여행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어느 지역을 여행하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것이라기 보다는 13세기 후반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느 지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물산, 동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했다.

이 책의 원 제목이 동방견문록이 아니라 '세계의 서술(Divisamento dou monde)'이라는 사실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님을 잘 말해준다.

동방견문록에 보이는 이러한 여러 특징들은 이 책이 그가 실제로 여행해서 체험한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보고를 교묘하게 종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예를 들어 중국에 관해 설명하면서 어떻게 만리장성이나 한자(漢字) 혹은 차(茶)에 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연구는 이러한 비판에 근거가 없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만리장성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다녀간 뒤인 명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인들보다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몽골인이나 색목인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한자를 몰라도 중국에서의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 차를 마시는 풍습 역시 당시 북중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크게 유행하지 않았었다는 점 등이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한편 마르코 폴로의 글에서는 그가 중국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쓰기 어려웠으리라고 판단되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같이 배를 타고 간 사신들 세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는 게 가장 대표적인 보기다.

이들의 명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그의 주장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중국의 한 학자가 영락대전 속에 포함된 참적(站赤)이라는 원대의 자료에서 마르코 폴로가 제시한 세 사신의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명단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중국 체류는 흔들릴 수 없는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글이 한 사람의 기억이나 간략한 비망록에만 의존해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상세하고 방대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원나라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있던 쿠빌라이의 궁전에 대한 설명, 과거 남송의 수도였던 킨사이(항저우ㆍ杭州)의 도시구조와 주민들의 생활에 대한 생생한 묘사, 동남해안의 항구도시였던 차이톤(취엔저우)에 대한 서술 등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동방무역이나 기독교 전교에 종사하던 수많은 이탈리아 상인과 선교사들의 축적된 지식이 그의 글 속에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볼 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한 여행가 모험가의 개인적인 성취라기 보다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낳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그 시대는 다름 아닌 몽골인의 세계지배, 즉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하던 기존의 분할적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다민족 다종교의 공존과 교류를 가능케 했던 소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시대였던 것이다.

■'마르코폴로 다리' 루거우차오

'마르코 폴로 다리'로 불리는 루거우차오(蘆溝橋)는 중국 베이징의 남서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거의 말라버린 융딩강(永定河)에 놓여있는 이 다리는 길이가 266.5㎙, 너비가 7.3㎙로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금나라때인 1189년에 건설됐으니 역사가 800년도 넘는다. 다리에는 11개의 아치교각과, 저마다 다른 모습의 돌사자 501마리가 있어서 당시로서는 최대한 멋을 부린 셈이다.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특히 아름다워 청대의 건륭제는 '노구효월(蘆溝曉月)'이라는 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지금도 베이징시는 루거우차오를 베이징 16경의 하나로 지정해놓고 있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난 이 다리의 난간에는 지금도 당시 일본군의 탄흔이 남아있다.

다리는 아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역사에세이팀이 찾은 지난해 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사람과 자전거가 북적거렸다.

하지만 차량은 통행할 수가 없다. 86년 7월 개축하면서 바닥을 뜯어고쳤는데 원래의 바닥은 다리 중간 부분에 일부 남아 있다.

다리 앞에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있는데 루거우차오뿐 아니라 항일운동 전체의 역사를 사진을 통해 보여준다. 다리 양 옆으로는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김호동·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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