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스웨덴월드컵을 건너뛴 한국은 62년 제7회 칠레월드컵을 앞두고 일본과 2차례 예선전을 2-1, 2-0으로 이겨 최종예선에 진출했다.당시 상대는 폴란드를 꺾고 올라온 유고슬라비아. FIFA(국제축구연맹)가 아시아를 동구권과 함께 편성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아시아최강이라는 자존심을 가진 한국팀은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공산국가와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밝혀 사실상 훈련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장기영축구협회장의 설득으로 군부는 FIFA가 지정한 마감시한 직전 출국을 허가 한국팀은 10여일밖에 훈련을 못하고 장도에 올랐다.
급하게 준비하다보니 여권이 안나와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1시간여 잡아두는 촌극을 연출, 외국인 탑승객으로부터 비웃음 섞인 박수를 받기도 했다.
30여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유고에서 운동장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사람들이 손바닥을 자꾸 내보여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5골을 넣겠다'는 뜻이었다. 10월8일 마침내 유고와의 원정경기가 시작됐다. 한국은 초반부터 상대의 거친태클과 몸싸움에 질려버렸다.
스트라이커 조윤옥, 정순천은 상대수비가 달려들면 피하기 까지 했다. 또 엄청난 슈팅파워에 생전 처음보는 바나나킥을 수시로 때리니 GK 함흥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과는 1-5의 완패. 세계축구흐름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우리들은 그러나 자국선수들이 입장할 때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쳐주는 유고관중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은 귀국하는 길에 터키, 이스라엘, 홍콩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이유는 돈을 받아 축구협회 살림에 보태쓰기 위해서였다.
터키, 이스라엘과 대등한 경기를 펼쳐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한국은 1달뒤 입추의 여지없이 관중들이 들어찬 효창구장서 열린 홈경기에서 또다시 1-3으로 패해 월드컵출전이 좌절됐다. 그때 종로 양지여관이 숙소였는데 정보부 직원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범구 기자
■62년 칠레대회
칠레는 60년 대지진이 발생, 월드컵 개최지를 아르헨티나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카를로스 디트볼 축구협회장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는데 월드컵 마저 뺏으려는가"라며 국제여론에 호소, 대회를 치렀다.
그러나 대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개막후 4일만에 부상자가 50여명, 중상자도 꽤 있었다.
이탈리아 기자가 칠레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 남미_유럽의 감정싸움으로 번졌기때문이었다. 칠레는 관중성원(?)에 힘입어 이탈리아와 강호 소련을 꺾고 4강에 진출했지만 브라질에 2_4로 패했다.
브라질은 헝가리 유고를 연파하고 결승에 오른 철통수비의 체코를 3_1로 물리치고 대회 2연패를 이룩했다. 당시 최고스타는 58년 대회에 이어 브라질 우승 주역인 '작은 새' 가린샤였다.그러나 그는 이후 부와 명예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약에 빠져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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