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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아버님, 우리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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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아버님, 우리 아버님

입력
200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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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나시고 49일 지나 탈상을 마친 게 1주일 전입니다. 너무나 큰 슬픔 속에 있었지만 아버지 가신 뒤 이 가슴 속에 남는 것은 오직 깊고도 따뜻한 사랑뿐인 것을 고백합니다. 자식들에게 특히 더 차가울 정도로 엄격하셨던 아버지.지금 오십이 훌쩍 넘어서야 그 사랑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머리를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처음 만져본 것 같습니다. 많지 않은 한 줌의 백발 밑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머리를 만지면서 당신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느꼈는지 모릅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거친 숨결을 쉬시다 가끔 괴로운 몸부림을 치실 때면 숨이 멎을 만큼 안타까웠습니다. 보름동안 얼마나 괴로우셨나요. 아버지, 괴로운 낮과 밤을 지내면서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싶으셨던 무엇이 있었다는 걸 요즈음에야 깨닫습니다. 자식들은 싫건 좋건 매일 병원에서 아버지 걱정과 함께 하나 둘씩 자기의 고민과 걱정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땅속에 누이고 돌아선 뒤 우리들은 오히려 하나가 되어 충만한 사랑으로 굳게 뭉쳐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긴긴 보름을 고통으로 보내다 가신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 모든 분들이 떠나시면 생전에 하신 말이나 행동이 빛을 보게 됩니다만 아버지가 하신 말씀들이 유독 많이 생각납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날, 이젠 사회의 유명인사를 포함해 중견이 된 동창들이 당시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모신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동감하면서 그러나 그 분이 쓰신 책만은 소유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무소유를 기본철학으로 살아왔지만 당신들같은 제자는 꼭 소유하고 싶다" 며 농담 섞인 얘기를 하셨습니다. 작년 생신 때는 "거백옥(遽伯玉)은 年五十(연오십)에 而知四十九年非(이지사십구년비)"라 했다.

나도 구십삼세가 되니까 구십이년을 잘못 살아온 것을 알았다. 앞으로 계속 발전하려면 클린턴 대통령이 말하던 'Never stop thinking tomorrow' 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석학들의 철학을 두루 섭렵하셨던 아버지, 94세에도 인터넷세계를 보셨던 아버지, 우리 형제들에겐 늘 등대같았고 다시금 도전의 불씨를 살리게 했던 아버지. 그래서 우리들의 슬픔은 더욱더 크고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훈(薰)형은 "정릉에 가면서 무얼 사다 드릴까 궁리하는 낙이 없어졌다"며 눈물을 지었고, 문(文)형은 옛날 어릴 적 아버지가 머리를 깎아주시면서 "반은 깎고 반은 뽑았다"며 막 웃다가 큰 울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아버지, 8년만에 어머니 누워 계신 곳을 열어보니 따사로운 햇볕 속에 잘 익은 곡식같은 금붉은 빛의 흙이 아버지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애통해 하며 그리워하시던 어머니 옆으로 가십니다. 탈상날엔 우리 모두가 울면서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렁?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당신같은 아버지를 가진 우리들은 정말 행복합니다. 그러니 아버지, 아버지도 행복하십니다. 이렇게 자식들에게 사랑받으신 아버지가 또 몇이나 있을까?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막내 상철이.

李 相 哲 한국통신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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