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아침에 찾은 갑천(甲川)은 참으로 조용했다. 대전시내를 관통하면서도 대도시의 때가 묻지 않았고, 금강에 합류하면서도 결코 거만하지 않았다.유성과 대덕, 두 넓은 분지를 가로지르며 말없이, 서해의 비릿한 바다냄새를 맡으러 갈 뿐이었다. 18세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ㆍ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갑천을 이렇게 묘사했다.
'골짜기 물이 온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이다. 갑천 동쪽은 회덕현이고, 서쪽은 유성촌과 진잠현이다.
사방을 산으로 막아 들판 가운데를 둘러쌌는데, 평평한 둔덕이 뱀처럼 뻗었고 아름다운 산기슭이 맑고도 빼어났다.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도 있으니, 대를 이어 영원히 살 만한 곳이다.'(이하 '택리지'ㆍ허경진 옮김ㆍ한양출판 발행)
이중환이 꿈꾼 이상향이 갑천 일대였던 것이다. 지금은 '대덕 밸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과학기술연구소를 거느리고 21세기 새 낙원을 설계하는 곳.
이중환은 이 곳에서 18세기 실학 이념에 맞는 새로운 삶터의 가능성을 찾아냈고, 어이없이 몰락한 사대부로서 자신의 울분을 토해냈다.
충남 공주 출신의 이중환은 숙종 39년(1713)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해 경종 2년 병조 정랑 자리까지 오른 1급 사대부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간 당쟁에 휘말려 영조 2~3년 두 차례 유배 후 공직을 마감한 비운의 선비이기도 했다.
1751년 완성된 '택리지'는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20여년동안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기록한 인문지리서이다.
'택리지'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살 만한 마을(里)을 고르는(擇) 책이다. 풍수사상과 실학이념에 의거해 전국 8도의 수많은 마을을 평가하고 그곳 지리와 물자 수송상태, 인심과 산수를 적었다.
'택리지'에 따르면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 남원과 구례가 첫째고, 순박한 인심은 평안도, 훌륭한 경치는 강원도 영동이 으뜸이다. 터를 골라 살기에는 충청도, 그 중에서도 갑천 일대의 유성이 최고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중환의 문화생태학적 사고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이익(李瀷)의 재종손으로서 우리 국토를 실학과 생태학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예전에는 인삼 나는 곳이 모두 대관령 서쪽 깊은 두메였는데, 산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느라고 들판에 불을 질러 인삼이 차츰 적게 산출된다. 장마 때마다 산이 무너져 모래가 한강으로 흘러 드니, 한강 물이 차츰 얕아지고 있다.'
그러면 이중환은 이러한 인문지리적ㆍ생태학적 주거론을 주장하고 이것에 자족하였던 것일까. 또 갑천 일대는 그가 말한 '사람이 관혼상제의 예를 다하며 여유 있는 생업을 갖고 살 만한'진정한 이상향이었을까.
갑천이 합류한 금강 줄기를 따라 공주와 부여를 지나면 얼마 안가 강경이 나온다.
이중환이 말년에 머물며 '택리지'를 쓴 팔괘정(八卦亭)이 이곳에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76호인 이 정자의 마루에 앉아 앞을 보니 금강(현지명 황산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중환은 '택리지'발문에 이렇게 썼다.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이 글을 논했다. 이 글은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와 교화의 연혁을 차례를 엮어 기록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 글은 살 만한 곳을 고르려고 해도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인심'편에는 또 이렇게 썼다. '사대부가 사는 곳 치고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은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없는 자를 거둬들이고, 권세를 부려 평민을 침해한다.''(지리와 인심을 살펴 마을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으며, 홀로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렇게만 되면 비록 농사꾼이 되거나 장인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사대부의 편가르기 행태로서 당쟁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자, 사대부의 정신 개혁 없이는 조선에 유토피아란 있을 수 없다는 준엄한 경고다.
허경진 연세대 교수는 "이중환이 '택리'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이 '그 마을에 사대부와 그로 인한 당쟁이 없을 것'이었다.
주거환경만으로 치면 최고 수준인 한양이 '택리지'에서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택리지'는 자신도 당쟁의 피해자인 이중환이 제살을 깎는 아픔으로 쓴 '사대부와 당쟁 비판론'인 셈이다.
팔괘정에서 바라본 금강은 아름다웠다. 금강이 강경을 지나면서 강폭이 급속히 넓어지기 때문에 시야까지 확 트인다.
그 아름다움은 몰락한 사대부의 한과 이상향에 대한 절실한 꿈으로 인해, 비애가 스며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김관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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