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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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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입력
2001.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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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이상용(李相용·57)은 '가정의 달'이 돌아오면 가정을 버려야 하는 사람이다.보통 때도 일주일이면 각종 행사나 TV프로그램 녹화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지만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들어있는 5월에는 한 달 내내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 집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다.

올해도 3일부터 6일까지 나흘 동안 전국 이곳 저곳에서 열린 스무 개 행사에 불려나갔다.

기자를 만난 9일에도 밤에는 부산에서 열리는 어버이날 관련 행사 사회를 봐야 한다며 이번에 가면 앞으로 열 하루 동안은 서울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30년 이상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 어린이와 노인들, 군인들, ‥, 거의 모든 국민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물해온 그는 그러나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는 '시련' '진실' '용서'와 같은 단어를 많이 썼다.

대중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것이 그의 직업인지라 그를 만나 나누게 될 대화도 가볍고 즐거우리라고 했던 예상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_나흘에 스무 개 행사 사회를 보려면 정말 힘들었겠다. 이동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을 텐데?

"환갑을 몇 년 앞둔 나 같은 사람을 지금도 찾아주니 고맙지 뭐. 그런데 옮겨 다니는 건 사실 힘든다.

특히 가까운 거리를 옮겨 다니는 게 더 고생이다. 얼마 전에는 안양에서 인천에 가야 하는데 길이 워낙 막혀 퀵 서비스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20여분 만에 도착한 적도 있다. 내 느낌엔 시속 200㎞ 이상으로 달린 것 같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오토바이를 제일 잘 타는' 이 퀵 서비스 오토바이 운전사를 25년째 이용하고 있다. 한 번 이용료는 30만원이라고 했다.)

_ 아직까지 오라는 데가 많은 이유는 뭐일까?

"내가 부담이 없는 대신 재미가 있어서겠지. 나는 출연료를 놓고 흥정을 안 한다.

주는 대로 받는데 그러면 다음 행사 때도 불러준다. 나는 불러주니 고맙고. 그러다 보니 몇 군데 지방문화제는 몇 년째 내가 단골로 사회를 맡게 됐다."

_혹시 출연료가 싸니까 불러주는 것 아닌가. 얼마나 받나?

"한 번에 200만원에서 300만원 받는다. 그런데 생각하니 싸기는 싼 것 같다. 가수는 노래 몇 곡 부르고 15분에 700만원 받는데 나는 세시간 사회보고 그 정도 밖에 안 받으니 말이다."

_ 언제적 뽀빠이인데 아직 어린이들한테 인기가 있나?

"나도 어린이들한테서는 잊혀진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아직도 어린이날 행사에는 내가 최고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내가 처음 맡은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를 보고 자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자기 아이들에게 그때의 즐거움을 전해주려는 것 같다."

기자가 그의 말에 관심을 더욱 기울이게 된 건 이 무렵부터였다. 어린이 관련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의 갑자기 그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_무슨 말인가?

"아니, 그거 있잖아. 한국어린이보호회를 만들어 심장병 어린이 1,000명을 수술해주기로 했던 거. 수술대상자 1,000명을 찾아 수술순서를 정해주었는데 567명 밖에 못해주지 않았나.

나머지 400여명은 내가 어린이보호회 일에서 손을 떼면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곧 생명을 잃을 아이들이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는 시련, 진실, 용서와 같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전후방 군부대 장병 위문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사회자로 인기 절정이었던 그는 1996년 12월 자신이 회장을 맡고있던 어린이보호회에 기탁된 후원금을 유용했다는 보호회에서 손을 떼야 했다.

"어린이보호회에서는 돈 한푼 갖다 쓴 게 없지만 한 번 소문이 나니 설 곳이 없었다.

방송출연도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단 돈 40만원을 들고 LA로 갔다. 날을 받아 놓은 딸 아이 결혼식도 1년 미뤄야 했다.

LA에서는 관광회사를 하는 후배의 도움으로 LA-라스베이가스 관광버스 가이드로 하루에 15시간씩 버스를 타면서 팁으로 살았다."

"몇 달 만에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나 귀국했지만 한동안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밤에는 자다가 일어나 머리로 벽을 찧기도 했다. 그 때 이후 오른 쪽 눈이 안 보인다. 속을 상해서 그럴 것이다."

어린이보호회는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그가 76년부터 출연료를 털어 심장병 어린이를 돕고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김수환 추기경 등 4만 여 명의 후원자와 성금이 모이자 79년에 본격적인 심장병어린이 돕기 단체로 태어난 것이 어린이보호회다.

"나를 보고 만들어진 단체인데 내가 손을 뗐으니‥. 수술순서를 적어준 번호표를 나눠줄 때 기뻐하던 모습이 선한데 제 때 수술을 받기나 했는지‥." (그가 운영하던 어린이보호회는 그가 물러난 후 어린이보호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행히도 재단 관계자는 97년부터 작년 말까지 788명의 어린이에게 수술을 해주었다고 밝혔다. 그가 뿌린 씨앗이 계속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_왜 그런 터무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보나?

"당시 정치 실세가 나더러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걸 안 하겠다고 했더니 보복 당했다. 증인도 있다.

나는 지금도 국회의원보다는 어린이왕초, 뽀빠이로 있는 게 훨씬 좋다. 뽀빠이는 전국민의 뽀빠이이지만 국회의원은 그 지역의 대표할 뿐이다.

또 그 동안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한다고 해왔는데 국회의원이 되면 정치를 하려고 그랬구나라는 뒷말도 듣기 싫었다. 그보다, 평생을 무대에만 서온 내가 무슨 정치를 한단 말인가?"

어린이보호회 일과는 별도로 그는 결식아동 615명에게 3년간 점심도시락을 싸주기도 했다.

자신보다 먼저 어린이 운동을 했던 방정환 선생의 동상이 남산길가에 나뒹굴자 1억5,000만원을 들여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겼고, 방 선생 유족들에게 집을 사 기증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을 실망시킬까봐 밤업소에도 나가지 않고 모은 돈 상당액이 이렇게 들어갔다.

그는 한동안 '한국에서는 착한 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 말은 그가 쫓기듯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들이 그에게 울면서 한 말이다.

아들은 비행기를 타려는 그에게 "어린이들을 위해 착한 일 한다면서, 정작 어린이 날에는 한 번도 우리와 같이 있어본 적이 없는 아빠가 한 일이 겨우 가족을 버리고 미국으로 달아나는 거냐"며 대들었다.

"한국에서는 착한 일 할 필요가 없다"는 아들의 말은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귓가를 맴돌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충북대에서 사회봉사학 겸임교수 자리를 주었다. 그래도 내가 사회를 위해 봉사한 걸 알아주는 분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고마워서 강의를 맡긴 했는데 막상 학생들을 보니까 남을 위해 살아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을 위해 살다가는 정작 자신의 삶은 다치기 쉽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진정한 봉사란 무엇인가'라는 시험문제를 내놓고도 '정말 이런 문제를 내는 게 옳은가'라는 의심도 했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졌는데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할 건 없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됐고, 예전처럼 무대에 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천직으로 돌아왔는데 더 따진들 뭐 하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_용서하게 됐다는 건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혼자의 힘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격려도 많이 받았고, 또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리 무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보내주었다는 글을 외었다.

'눈이 왔다.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되면 눈은 녹고 너는 나타난다'라는 내용이었다. "시련에 분노하지 말고 참으면 진실이 밝혀진다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주신 건데 그 말을 되뇌면서 억울함을 참을 수 있었다."

노인대상등 4개프로 진행 "장병위문 방송 또 맡았으면"

■노인 8,200명에게 돋보기 보내

요즘 그는 방송 프로그램 네 가지를 맡고 있다. 그 중 둘은 노인들을 위한 TV프로그램이다.

이 두 프로그램에서 그는 혼자된 노인들을 중매해주는가 하면 노년을 뜻 깊게 보내는 법에 대해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이처럼 활발한 방송활동 때문에 그는 벌써부터 재기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아니라고 말했다.

"우정의 무대를 녹화하다 쫓겨났다. 그걸 마쳐야 재기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여태까지 해온 프로그램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인데 제발 다시 한 번 장병위문 방송을 하게 됐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맡겨주면 국적불명의 프로그램이 판치는 방송가에서 최고의 토종 프로그램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장병위문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의 무대'와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뽀빠이는 이미 재기했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가 3년 전부터 노인들에게 돋보기 보내기 운동을 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였다.

"3년 전에 탑골공원에 갔더니 깨진 돋보기를 끼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다. 나도 한 눈을 잃어 고생을 하는데 저 분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돋보기를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8,200명에게 돋보기를 보냈다. 노인들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어 정말 기분이 좋다."

편집국 부국장

so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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