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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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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김창숙

입력
2001.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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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10일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이 서울에서 별세했다. 향년 83세.김창숙의 호는 심산(心山)이다. 그러나 그보다 덜 알려진 또 다른 호 벽옹(壁翁)이야말로 그의 대쪽 같았던 삶을 서늘하게 상징하고 있다.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의 호 벽옹이 가리키듯 심산은 장년기 이후를 앉은뱅이로 살았다. 그를 앉은뱅이로 만든 것은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이었다.

심산이 일제 시대를 살아낸 방식은 망명지인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과 국내에서의 옥살이였다.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심산은 재판정에서도 일제의 법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변호사들의 변론을 거부했고, 재판장에게 경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항소를 하지도 않았다.

그가 해방을 맞은 것도 일제의 감옥에서다. 그러나 해방이 옥살이의 끝은 아니었다. 경북 성주 출신의 이 비판적 유학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몇 차례 심산을 감옥에 처넣었다.

심산의 공적 삶은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 뒤 을사오적(조약에 찬성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의 목을 벨 것을 국왕에게 상소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그 뒤 애국계몽운동, 비타협적 항일 투쟁, 반독재 투쟁과 통일정부 수립 운동에 진력하며 말 그대로 지사적 삶을 살았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지배적 신분이었으면서도 망국 이후에 보신을 향한 내적 망명 상태로 잦아들어버린 유림(儒林) 일반의 야루(野陋)는 오직 심산 한 사람의 헌걸찬 삶을 통해서 겨우 상쇄될 수 있었다.

심산은 조선조의 마지막 유자(儒者)이자, 민중성을 수혈해 경신을 모색하는 새로운 한국 유학의 비조(鼻祖)였다고 할 수 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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