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재벌에 대한 채찍을 잠시 거둬들이고 당근을 내밀 모양이다. 진념(陳稔) 경제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만들어진 기업관련 규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이후 정부가 재계를 상대로 의견수렴에 나서는 등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부총리 입에서 이례적으로 '전면 재검토'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정부의 의지가 간단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정부가 스스로 규제가 많음을 시인하면서 까지 규제개혁을 들고 나온 배경은 어려운 경제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침체를 거듭하던 경기가 올들어 조금씩 살아나는 조짐이 계속되고 각종 경기지표도 청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기업의 투자만은 여전히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경기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우리 경제를 선도하는 대기업들이 잇따라 '비상경영'을 선언하면서 투자계획을 대거 취소하거나 축소하는 상황에서 기업 활동을 북돋우지 않고는 경기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규제완화는 정부가 가장 쉽게 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지만 규제완화에 관한 한 정부와 재계 입장은 전형적인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정부는 이번 규제완화가 재벌정책의 큰 골격은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마지노선을 분명히 제시했지만, 재계는 총액출자제한과 30대기업집단지정제도 같은 현 정부 재벌정책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고 있다.
정부가 규제완화의 화두를 던지기 무섭게 재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속에만 담고 있던 쌓인 불만들을 일제히 터뜨리고 있다.
특히 최근 논란을 빚은 자유기업원 민병균(閔炳均)원장의 글("시장경제와 그 적들")은 현 정부에 대한 재계의 불만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민원장은 이 글에서 "지금 정부는 참여연대, 전교조, 민노총등과 합세하여 한국사회를 국정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며 자본주의의 근간을 침식하는 이러한 체제변혁에 우익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시장경제의 정착'을 상징적 정책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시장의 기능을 되살린다는 의미는 시장 메커니즘을 왜곡시키는 모든 외부적 제약요인의 제거를 뜻하지만 좁게는 우리 경제의 고질적 폐해로 지적되는 관치(官治)경제를 개혁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주도적 역할이 불가피해지면서 정부의 힘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정부하에서 관치가 오히려 강화했다는 지적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서로가 비난하지만 관치경제의 책임은 정부와 재계 모두에게 있다. 규제는 경제개발과 역사를 같이 해온 해묵은 정경유착(政經癒着) 관행의 매개체였다.
이번 규제완화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히 끊는 실질적인 개혁이 되길 기대한다. 세계를 무대로 무한경쟁을 해야 할 우리 기업의 전사들이 내부에서 정치인이나 관료들과의 연을 쌓는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한다면 우리 기업, 우리 경제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배정근 경제부장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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