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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특집 / 월드컵과나 - 문정식 축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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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특집 / 월드컵과나 - 문정식 축구협회 부회장

입력
200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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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가을. 말레이시아의 한 호텔에서 TV로 펠레를 보고 반했던 기억이 난다. 현란한 드리블과 수비벽을 절묘하게 피해 날아가는 슛. 우리 선수들은 브라운관을 통해 20세기 최고 축구스타의 탄생을 피부로 느꼈다. 펠레의 등장으로 유명한 58년 제6회 스웨덴 월드컵.그러나 한국은 잊고 싶은 기억을 간직한 대회다. 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한국은 이 대회에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출해야 하는 참가신청서가 축구협회 한 직원의 책상 속에서 잠자는 바람에 예선에도 출전하지 못한 것이다.

빨간색 상의에 하얀 반바지 유니폼. 당시 '붉은 악마들'은 '아시아에서는 죽을 운이 아니면 우승한다'라는 자신감으로 뭉쳐 있었다. 58년 10월. 대표팀(당시 명칭은 서울 구락부)은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과의 경기를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17경기에서 무패행진(11승6무). 한국은 즉석에서 아시아청소년대회의 원조가 된 59년 라만배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월드컵에 큰 비중을 둘 형편이 못됐다. 사회여건도 그랬고 아시아 조예선(당시 동반구예선으로 지칭)서 1위를 해도 유럽과 플레이오프를 벌여야 했다.

월드컵 본선진출은 그만큼 '좁은 문'이었다. 군대가 사회발전의 중심축이었던 당시 한국축구도 군대중심으로 발전했다. 일반팀의 명맥이 거의 끊긴 상황에서 특무대, 헌병대, 공병단 등이 한국축구를 주름잡았다.

내가 선수로 뛰던 시절 특무대는 6년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팀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해외나들이를 딴 세상 이야기로 받아들이던 시절. 1년에 몇 번씩 해외원정을 다녔던 축구선수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김희갑 구봉서씨 등 당대 연예인들은 우리들과 친분을 넓히기 위해 애썼다. '외국물'을 맛본 우리들은 연예인들에게 외국의 유행을 전하는 '메신저'였기 때문이었다.

선수의 기량은 아시아 최고수준이었지만 한국은 경기장 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었다. 군대 연병장이던 효창운동장을 급속히 개조해 60년 아시아선수권을 치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한국축구는 계속 발전해 왔다.

나는 62년 월드컵 최종예선서 유고에 패해 정작 월드컵 본선무대에 서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년 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본선을 볼 수 있다니 꿈을 이룬 것 만큼 감개무량하다.

▼약력

문정식(71) 축구협회부회장은 56년부터 7년간 대표선수 생활을 했다. 58년 말부터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포지션은 미드필더. 특무대_대한중석_제일모직에서 선수로 뛰었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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