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표범은 안개비가 내릴 때는 털빛이 상할까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전한다.표은(豹隱)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ㆍ1435~1493)의 7년간 남산 칩거도 그와 같았다.
세속의 영달은 안개비 같이 부질 없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임금이 되던 날,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지조의 삶을 위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한 김시습이 아니었나.
오랜 가뭄 끝에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던 지난달 29일, 남산 오르는 길에 범이 나올 걱정은 없었던 셈이다.
180개의 봉우리, 30여개의 계곡을 품고 있는 남산은 절터가 100여곳, 석탑과 불상이 150여개가 남아있는 신라 불교 유적의 보고다. 해발 468㎙의 금오봉 못 미쳐 자리잡은 용장사(茸長寺)도 그 중 하나.
김시습이 29세 때부터 7년간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유가종을 연 신라의 고승 대현(大賢)이 주석했다는 이곳은 이제 터만 남아있지만 한 때 찬란한 불국의 꽃을 피웠을 것이다. 단종 폐위 후 김시습도 이 곳에서 정토의 이상적 세계를 꿈꾸었을까.
비오는 날, 용장사로 올라가는 계곡과 등산길에 인적은 끊겨 있었다. 한낮인데도 먹구름으로 어둑어둑해진 날씨, 적막한 공간에 파장을 일으키는 비 듣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철철 울리는 계곡의 물소리는 비현실적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것 같았다.
'금오신화'의 세계로 들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귀신, 염라왕, 용궁 등 금오신화의 소재는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만복사의 저포 놀이'(萬福寺樗蒲記) '이생이 담너머를 엿보다'(李生窺薔傳)'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 이야기'(南炎浮州志)' '용궁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龍宮赴宴錄).
금오신화 속 다섯편의 단편소설은 귀신과의 사랑, 염라왕과의 토론, 용궁에서의 생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세속을 등진 이의 삶을 초월한 듯한 이 소설에는 극락왕생의 해피엔딩이 없다. 그 속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이들이 바라보는 비극이 깔려있다.
'만복사 저포놀이'에서 노총각 양생은 부처님과의 저포놀이(나무로 된 주사위 같은 것을 던져 승부를 다투는 놀이)에서 이겨 아리따운 배필을 만나 더 없는 운우의 정을 나눈다.
그러나 양생은 여인의 부모를 만나 그녀가 이승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정조를 지키다 해를 입고 숨진 귀신이었다.
여인은 양생과 다시 만났을 때 "저승 길이 기한 있어 애처롭게 이별한다오/ 바라건데 임이시여 조금도 멀리마오/
슬프고 슬퍼라 우리 부모여/ 나를 짝 지워 주지 못하셨네/ 아득한 저승에서 한이 맺혀 있으라" 라는 소리를 남기고 떠나간다.
'이생이 담너머를 엿보다' 에서도 개성 총각 이생은 같은 동네의 아리따운 처녀와 부부가 되지만 고려말 홍건적의 난에 여인이 숨지고 만다.
여인의 못다한 한과 이생의 극진한 사랑으로 둘은 함께 살지만, 여인은 얼마 후 떠나고 이생도 곧 숨진다는 이야기다. 귀신과의 슬픈 사랑이야기에는 인간의 고독과 우수가 짙게 배어 있다.
이젠 터만 남은 용장사에서 화려한 불국토의 영광을 찾을 수는 없었다. 3층 석탑과 마애불, 목이 떨어져 나간 석불만 남산의 안개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시습의 시선도 세상 바깥에서 세상 안을 바라보는 우울한 응시였다. 탈속의 도피처에서 악몽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떠나려 했지만, 바깥 또한 '안의 안'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생 속에 부처가 있듯이.
불가로 출가했지만 여전히 성리학자였고, 환속과 출가를 반복했으며, 탈속과 방랑의 세월에서도 관직의 꿈을 가졌던 김시습의 모순된 삶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애초의 지조를 버리고 세조를 찬미하기도 하는가 하면 세조가 찾을 때 똥통에 빠져 미친 척 하며 도망치기도 했다.
'김시습은 이인/ 우연히 해동에 떨어졌네/ 좋아라 팔짝거리고 크게 웃으며/ 천지간 유희하였지/ 왕후공상이 높은 들 초파리로 알고/ 곧바로 조물주와 벗하였네/ 유자도 없고 불자도 없는데/ 세상을 바보들의 조롱으로 만들었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국의 평이다
김시습은 질서의 경계에서 질서의 균열과 직면한 아이러니스트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스트는 완전한 질서를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꿈을 저버리지도 못한다.
그 경계에서 몸부림치는 까닭에 그 뒤엔 비장함이 깃들어 있다. 금오신화에 담긴 사랑의 비극이 숭고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 일찍 자취를 감췄던 금오신화는 일본에서 전해 내려왔고, 1920년대 국내에 다시 소개됐다.
당시에는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했다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로 '삼국유사' 등을 통해 국내에 전승된 민간설화와 민중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순된 민중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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