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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故 정 회장의 숙제

입력
2001.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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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한지 한달 반 정도가 지났다. 추모의 열기는 사라지고, 고인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그러나 그의 타계를 한 기업가의 사망으로, 시간이 가면 잊혀지는 것으로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인 현대그룹을 창립해 이끌어 온 장본인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단순히 고인의 일대기를 정리하자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성이나 영웅 만들기 식의 전기를 쓰자는 것도 아니다.

이제 요구되는 것은 그의 총체적 삶의 궤적을 충실히 추적하는 다운데 현대그룹으로 상징되는 한국 재벌의 공(功)과 과(過), 문제점 등을 냉정히 평가ㆍ분석하자는 것이다.

재벌만큼 우리 일상생활 구석구석에서부터 국가경제 전반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도 없다.

또 재벌은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업구조다. 그러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를 만든 주역이라는 점에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반면 IMF 체제를 불러온 주범이었다는 점에서도 거의 생각이 같다.

평가가 엇갈리는 이들 재벌이 개혁돼야 한다는 데도 한 목소리다. 그렇지만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객관적 자료, 종합적 분석은 부족하다.

기본적인 판단 자료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인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분석ㆍ평가가 필요한 일차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 전 명예회장의 타계는 한국 경제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장의 말을 빌면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간다는 뜻이고, 기업사적인 측면에서는 창업자 주도형 재벌체제가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뀌는 계기다.

인물사적인 의미에서는 '영웅'과 '거인'의 시대가 사라지고 보통사람과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이 이끄는 사회가 다가왔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의미 부여는 쉬워도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연구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 대기업 사례나 이론은 자주 인용 되지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우리 경우에 대한 분석은 찾기 힘들다.

외국 사례나 이론을 우리에게 적용하려고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다. 기업 풍토가 판이하니 당연한 현상이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수준인 현대건설은 왜 유동성 위기에 빠졌으며, 정 전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 해 터 놓은 금강산 관광이 어찌해서 현대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기업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직접 뛰어드는 것, 그리고 정경유착과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명쾌한 분석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재벌 개혁을 두고 한쪽에서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이처럼 셀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반박하고 있다.

재벌 개혁이 말로만 요란했지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IMF체제 2년을 맞으면서 경영ㆍ경제학자들의 자기반성이 있었다. 한국 경영ㆍ경제학의 무국적성과 취약성 등으로 우리 기업과 경제사회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내놓는데 무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고백이었다.

정 전 명예회장의 타계는 이 같은 반성의 연장선상에 놓여야 한다. 그의 타계는 우선 현대를 비롯한 재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워지고 발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지 등에 대해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 전 명예회장이 남긴 숙제인 것이다.

이상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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