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꺼내 보는 책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김대래군의 '문화로서의 폭력'이라는 책이다.지금은 부산 어느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이며 또 오랜 기간 언론쪽 일을 해온 친구인데, 그의 책 가운데서도 '산딸기'얘기를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1967년 강원 명주군 대관령 아래 산골의 송양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군내 각 초등학교 대표가 겨루는 문예, 주산, 미술경시대회에 그 친구와 동시부 대표로 나간 적이 있었다. 둘 다 학교에서는 글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선생님도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날의 기억을 친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경시대회에서 주어졌던 제목도 흔히 볼 수 있는 '산딸기'였다.
친구들과 이 산 저 산을 넘어가며 따먹던 산딸기, 소 먹이러 가서 맛보는 몇 안 되는 즐거움의 하나,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상이 잡히지 않았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파란 잎사귀와 함께 너무도 선명하게 머리에 들어오면서 그 빨간 색상의 강렬함 때문인지 산딸기의 이미지는 '빨갱이'라는 말속에 들어 있는 그런 강렬함으로만 다가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나만 그런 생각을 한 줄 알았고 그 친구도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한 줄 알았다. 선생님이 왜 제대로 쓰지 못했냐고 질책할 때에도 우리는 차마 딸기에서 느껴지던 공산당과 반공방첩의 이미지를 얘기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도 어떤 부끄러움처럼 말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당시 마을에는 한국전쟁때 아버지를 잃은 형들이 적지 않았다.
반공OO대회도 참 많았는데 특히 경시대회 직전,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간 수박을 빨갱이에 비유한 반공웅변대회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러다 25년쯤 지난 어느 추석날 저녁, 고향을 찾은 우리는 가겟집 뜨락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비로소 그날을 얘기했다.
우리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상마저 구속하는 어떤 문화의 폭력'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았다고 그 친구가 먼저 입을 열고 나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무수한 글짓기를 했으며 다른 대회 때의 시제는 입상했을 때의 것까지도 다 잊어버렸는데 그 '산딸기'만은 아직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지금도 나는 글이 잘 안 풀리면 그 친구의 칼럼집을 꺼내 그 부분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다.
그때의 '산딸기'처럼 내 글의 상상력을 강박적으로 포위해 들어오며 조이는 또 다른 '산딸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고.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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