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68) 시인이 새 시집 '순간의 꽃'(문학동네 발행)을 냈다.100여 수의 시가 실려있지만, 각각의 시에는 별도의 제목도 없이 모두 '*' 표만을 경계로 해서 죽 이어져 있다. 시집제목 '순간의 꽃'이 암시하듯 이 시편들은 찰나에 시인의 영감 속으로 떠오른 단상들을 옮겨놓은 것이다. 선(禪)적 깨달음의 기록이랄까, 현실과 영감, 감응과 언어 사이에는 간격도 시차도 없다.
'눈길 산짐승 발자국 따라가다가/ 내 발자국 돌아보았다' 이 단시처럼 시인은 폭설 퍼붓듯 하는 세상살이에서 문득 걸어온 길 뒤편, 눈에 파묻힌 발자국을 돌아보는 심경으로 언어를 토해놓았다. 그에 따르면 '순간 속의 무궁'이다. '나는 내일의 나를 모르고 살고 있다// 술 어지간히 취한 밤/ 번개 쳐/ 그런 내가 세상에 드러나버렸다'
그 무궁에는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처럼 한 길을 가는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게 아니었다' 같이 자연의 순환에서 본 신생의 축복을 노래한 시도 있다. 사람살이에 대한 경외감이 이번 시집에서는 두드러지는 듯하다.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구절 구절이 그대로 시차 없이 읽는 이의 가슴에 들어와 자리잡고 앉는 경지야말로 47년 시인의 길을 걸어온 언어의 힘일 것이다.
그는 "올해초 '만인보' 작업 외에는 시가 쓰여지지 않아, 영영 시 한 줄도 나오지 않는 마른 옛 샘인가 하고 허망에 잠겨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소나기처럼 쓰여진 것이 '순간의 꽃'에 실린 작은 시 100여 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당의 기운과 비슷하다.
"혹시 나에게는 시무(詩巫)가 있어 여느 때는 멍청하게 있다가 번개 쳐 무당 기운을 받으면 느닷없이 작두날 딛고 모진 춤을 추어야 하는 지 모른다."
되풀이될 '시와 삶의 불화', 그것을 '다음의 시'를 위한 화원으로 가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재가 되어서야/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하더이다/ 10년 내내/ 제 불은 재가 되어본 적 없음이더이다// 늦가을 낙엽 한 무더기 태우며 울고 싶더이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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