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모순과 균열, 예리한 시적성찰로 간파해내일상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의 근본적인 속성은 그 진부함과 지리멸렬함에 있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세속적 현실들은 어떤 드라마틱하고 일탈적인 사건들도 그 안에 녹여 버린다.
문학이 이 일상성의 구조에 저항한다면 두 가지 방향에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 하나는 일상성을 깨트리고 나가는 위험스런 탈주의 모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방식은 그 일상의 시간들 안에 깊숙이 들어가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허술하며 허위에 가득찬 것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매끈하고 온전하고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우리의 나날의 삶 속에 내장된 깊은 모순과 균열이 감지될 수 있다.
90년대 시의 한 중요한 주제였던 일상성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욱 날카롭게 다루어져야 할 테마이다. 새로운 젊은 시인들이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시적 개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있는 일이다.
이기성과 이승수의 시에서 발견되는 일상성에 대한 시적 성찰은 앞에 말한 후자의 방식에 가깝다.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 안에 웅크린 위태로움과 가증스러움을 찾아내는 발견술은 시인의 눈이 세상의 표면을 뚫고 그 안의 깊고 어두운 구멍을 간파하는 능력에 대응한다.
이기성의 ‘모래, 일요일’(‘현대시’ 4월호)은 일요일의 풍경에 관한 시이다. 그 풍경 안에는 ‘자는 애들을 깨워 화사한 모래 언덕에서 지글지글 고기 굽는’ 장면과 ‘풀들 초록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엉겨붙어 있는 일요일’ ‘지하철에서 끈적한 손가락으로 눈가의 졸음 떼어내며 나의 이웃들 돌아오’는 장면이 겹쳐진다.
그런데 왜 하필 일요일의 ‘모래’ 일까? 봄날의 황사 때문이라고 말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래로 된 정원’ ‘모래 언덕’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안전한 일요일이 얼마나 허술한 지반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 나라의 폭동’이 풍문처럼 스치는 이 평온한 시간에 ‘게으른 하품 벌어진 나의 입으로 보랏빛 모래들이 마구 날려오’는 것, 또 ‘거대한 홍수처럼 모래정원이 통째로 떠내려’ 오는 것은 마치 엄청난 재앙의 예감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차라리 일요일에 관한 끔찍한 묵시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승수의 ‘그는 왜 유머가 늘었는가’(‘현대시’ 4월호)는 독백적인 화법으로 자신이 삶의 방식의 변화에 대해 진술한다. 그 변화는 ‘유머가 늘었다’ 혹은 ‘덜 고지식해졌다’ 등으로 표현되는 어떤 유연함의 증대와 관련된다. 하지만 그것은 속악한 세상의 법칙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오늘 몇몇 상사에게 웃는 낯으로 “승진을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한때 몹시도 살의를 느낀 적이 있었던…’ 이라고 진술하고, ‘승진, 진화…헤헤 몸이 더 날래지고 눈이 점점 커지면서 먹이를 노리는 것이나 새끼를 키우는 것에 더 유능해졌다는, 당연한 사실들을’ 고백할 때, 화자는 이 짐승스러운 정글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어리버리하니 가난하고 순진하며 못생긴 것들’은 그런 세계의 반대편에 도태되고 멸종되어가는 희귀종들이다. 이 시의 말줄임표 안에는 이런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화자의 부끄러운 자의식이 숨어 있다. 그 말줄임표들은 지금 이 생이 정말 살만한 것인가를 머뭇거리며, 아프게 묻는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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