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학 / 윤대녕 장편 '사슴벌레 여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학 / 윤대녕 장편 '사슴벌레 여자'

입력
2001.05.02 00:00
0 0

내존재를 무엇으로 설명할수 있을까1980년대의 서사(敍事)와 90년대식 감수성이 지나간 뒤 2000년대 문학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작가 윤대녕(39)씨의 경우 첫발을 '디지털'로 내디딘 것 같다.

'사슴벌레 여자'(이룸 발행)는 그가 2000년대 들어 처음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그는 '컴퓨터가 가족보다 중요하다'는 여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름을 묻자 여자는 '사이보그'라고 대답했다. 소설을 쓰는 동안 그는 "인터넷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비트와 바이트의 이름으로 살았다"고 했다. '기억을 이식한다'는 SF영화 같은 소재를 선택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청 전철역에서 깨어난 '그' 남자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남자는 '노란 장미'라는 여자를 만나 '달걀 도둑'이라는 아이디를 부여받고 동거에 들어간다.

노란 장미와 달걀도둑의 동거생활은 두산타워, 김광석, 시네하우스 같은 문화적 기호들로 채워진다. 여자는 현대백화점에서 게스 청바지를 구입하며, 지펠냉장고를 갖고 싶어하고, 빨간 마티즈를 살까 고민한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씨는 이런 기호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소설 속에 존재감을 주는 요소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기호들이 '세련된 도우미' 역할에 그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덕수궁 오르세 미술전의 관람객으로, 이계진 아나운서가 중학동 본까스 음식점의 손님으로 출연하는 배경은 '살아서 펄떡거린다'. 소설은 실사(實寫)를 배경으로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같다.

노란 장미의 주선으로 남자는 기억 이식 중개인인 M을 소개받고 무인호텔에서 이명구라는 사람의 기억을 구입한다. 스물여덟살, 사슴벌레를 사육하는 별난 취미를 갖고 있었으며 뇌종양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다 죽은 남자의 기억. 그는 이명구의 기억을 받고, 부정(不貞)한 애인에게 품었던 살의까지 물려받았다.

이명구처럼 나타난 그 남자에게 애인은 "내 삶의 OFF 스위치를 눌러달라"고 요구한다. 시간이 지난 뒤 그는 노란 장미의 어깨에 새겨진 사슴벌레 문신을 발견한다. 기억을 이식받은 자의 징표로 그의 어깨에도 박혀 있는 것을.

'기억'의 의미에 대해 노란 장미는 "생필품 중 하나"라고 말한다. 기억이식 중개인은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컴퓨터나 신용카드가 없다면 내 존재를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인간 존재를 설명하려면 복잡하고 추상적인 의미 대신 눈에 보이는 숫자와 정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디지털의 사전적 의미는 '숫자를 이용해 정보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휴대폰과 컴퓨터로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 기억이 바꿔치기할 수 있는 물건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기억을 이식받은 그 남자처럼 윤대녕씨도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오래된 탐구의식을 뒤로 하고 다른 무언가를 이식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련된 문화 기호와 SF영화를 점점이 박은 그 무엇은 '디지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지영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