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계가 나노 기술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극미세 기술을 뜻하는 나노 테크놀로지는 21세기의 핵심 연구로 세계 각국이 주목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1980년대 이후 IBM이 분자 하나하나를 제어할 수 있는 주사터널현미경(STM)을 개발하고, 나노미터(㎚ㆍ10억분의 1㎙) 크기의 축구공 모양 탄소(풀러린), 관 모양의 탄소나노튜브 등이 신소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면서 본격화했다.
국내에선 물리학이 나노 연구를 앞서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국내 화학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
20~21일 열린 대한화학회에서도 나노 화학 심포지엄에 수백 명이 몰리는 등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화학자들은 "원자 몇 개를 늘어놓은 정도에 해당하는 나노미터의 입자를 만들고 제어하려면 화학적 접근이 필수"라고 말한다.
즉 작은 입자를 균일하게 만들기 위해선 조각을 계속 잘라나가는 물리적 접근보다 원자들을 쌓아올리는 화학적 접근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온도 등 조건을 맞추고 입자 주위를 계면활성제로 둘러싸는 식으로 나노 입자를 균일하게 만들 수 있다.
서울대 응용화학부 현택환 교수는 이런 접근을 응용,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막대자석'을 만들어 지난해 미 화학회지에 발표했다.
자성을 띤 두께 2㎚, 길이 7㎚의 막대모양 철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막대 자석의 1,000만분의 1 크기다.
자성을 띤 나노 입자는 꿈의 '테라비트 메모리'를 가능케 한다. 플로피ㆍ집 디스크, 비디오 테이프의 헤드에는 이러한 자기물질이 발라져 있다.
그 자기 입자 하나가 1비트. 즉 입자가 작을수록 메모리 용량이 커진다. 나노 입자 수준이라면 현재 1.4메가비트 용량의 플로피디스켓에 그 100만 배를 저장할 수 있다.
나노 기술은 생명공학에도 중요한 기본 기술이다. 서울대 화학부 최진호 교수는 지난해 DNA를 포함하는 유기물과 무기물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잡종) 물질을 개발, 효율이 높은 약물 전달체로 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화학회지, 독일화학회지 등 유명 저널에서 크게 주목받았고 세계 특허도 출원된 상태.
현택환 교수는 자기를 띤 나노 입자가 액체 자석처럼 사용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나노 입자의 표면에 일정한 처리를 해서 항암제를 결합시킨 뒤 체내에 투입해 봅시다.
입자가 아주 작아 혈관 속을 액체처럼 흐를 뿐 아니라 자성을 띠므로 자기장을 걸면 따라 움직입니다. 즉 암 부위에만 효과적으로 약물을 전달해 환자의 고통을 더는 약물 전달매체가 되는 셈이죠."
나노 크기의 물건을 만들고 쌓는 등의 '장난 같은 연구'도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과학기술원 천진우 교수는 나노 막대, 나노 꺽쇠, 나노 피라미드 등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반도체 나노 결정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고 특성을 연구한다.
서강대 화학과 윤경병 교수는 거꾸로 나노 크기 '구멍'이 있는 제올라이트를 연구, 나노 입자를 3차원적으로 가지런히 쌓아올리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극한의 크기에 도전하는 나노 기술을 '재료학의 게놈 프로젝트'라고 비유하고 있다. 앞으로 물리, 화학, 생명과학 분야의 경쟁과 협동은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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