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30)씨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995년. 결혼 3개월 만에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완전 마비됐다.2년 여의 세월이 지나면서 정신적ㆍ신체적 고통은 어느 정도 치유됐지만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불가능했다.
K씨 부부는 의사와 상의해 전기자극 충격요법으로 체외수정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척추에 문제가 있어 체외수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은 결국 정자은행에서 다른 남자의 정자를 제공받아 아기를 낳았다. K씨는 "남의 정자를 아내의 자궁에 넣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절반은 우리 부부의 피가 섞였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시험관아기 등 생식의학이 발달하면서 불임부부의 고민이 상당부분 해결됐다. 하지만 고환 기능의 장애로 정자를 만들지 못하는 무정자증 환자나 선천적으로 정관이 없는 남성은 입양을 하거나 타인의 정자를 얻어 인공수정을 할 수밖에 없다. 결혼 10년 이상 된 부부의 불임 비율은 세계적으로 15%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5% 안팎에 불과하다.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아기를 갖는다는 얘기다. 그만큼 정자은행의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다.
■ 누가 정자를 사나
정자은행이란 정자를 채취해 냉동 보존액과 혼합, 용기에 넣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탱크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인공수정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을 말한다.
서울대병원, 부산대병원, 차병원, 미즈메디병원, 삼성제일병원, 함춘여성클리닉 등 유명 산부인과 전문병원이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나중에 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해 자신의 정자를 보관하는 '자가 정자동결'과 비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한 '공여 정자동결'로 나눌 수 있다.
타인의 정자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정자를 만들지 못하는 무정자증 환자나 정관수술 후 다시 아기를 가지려는 남성, 암치료 과정에서 생식능력을 상실한 남성 등이 해당된다.
우리 민족은 '씨'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해 남편의 형제에게서 정자를 제공받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다. 정자은행을 이용하는 불임 부부는 남편의 형제가 없거나 훗날 상속문제 등을 염려해 친척의 정자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 정자는 어떻게 구하나
과거엔 의대생들이 주공급원이었다. 하지만 1993년 경희대병원이 에이즈 검사 등을 하지 않은 갓 받아 낸 '신선 정액'을 이용, 인공수정을 하다 적발된 사건 이후 의대생 공여자가 많이 줄었다.
정자은행별로 차이는 있지만 정자를 제공하는 남성에게 교통비와 식비조로 5만∼10만 원을 지급하는 것이 상례. 돈이 안되기 때문에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대 출신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세운 함춘여성클리닉은 서울대생의 정자만 고집한다. 두뇌가 우수하고 의학적인 지식도 풍부해 정자 채취가 비교적 수월하기 때문이다. 공여자에게 10만 원을 지급한다. 강남차병원은 포천중문의대 학생들의 정자를 기증 받는다.
미즈메디병원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3개대 학생의 정자를 주로 제공받는다.
서울대와 부산대병원은 현금 대신 문화상품권이나 도서상품권 등을 지급한다.
서울대병원은 정자 제공자에게 ▦자기 자식임을 주장하지 않을 것 ▦정자를 제공받은 이의 신분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 ▦자신의 신분도 엄격히 비밀로 할 것 등을 서약 받는다. 정자은행이 불임부부에게 정자를 제공할 때는 20만~25만 원 정도를 받는다.
공여된 정자는 보통 5명 미만의 여성에게 10~15회 정도 사용된다. 이론적으로는 자신도 모르는 대여섯 명의 혈육이 거리를 활보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당연히 근친결혼의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 미즈메디병원 조종현 원장은 "미국에선 공여된 정자를 10명의 여성에게까지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며 "통계학적으로 인구 1,000만 명의 도시에 서로 모르는 30명의 혈육이 살고 있어도 결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차병원 정형민 교수는 "기증 정자를 이용해 시술할 경우 키, 혈액형, 피부색 등을 감안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부모의 피부색이나 혈액형과 크게 다를 경우 의심을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비뇨기과 백재승 교수는 친족간 정자 공여에 대해 부정적이다. "형의 정자로 동생 부인이 임신한 경우를 상상해 보라. 가족모임에서 볼 때마다 '내 새끼'라는 감정이 안 생기겠나.
'정신적 근친상간'이라는 죄의식을 가질 수도 있고 친척, 가족 간에 비정상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우려가 크다. 훗날 남편이 내 자식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상속 등을 둘러싼 법적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 정자 제공 법규 없어 운영관리 허술
대한의학협회는 1993년 5월 '인공수태 윤리에 관한 선언' 을 제정, 공여된 정자에 대해 매독, 간염, 에이즈, 소변검사와 염색체 확인 등을 거치도록 했다. 하지만 강제규정이 아니어서 병원마다 운영 방식이 중구난방이다. 정신질환, 지능지수(IQ), 인성검사 등은 하지 않는 곳이 많다.
최근엔 상업적 목적으로 불임 부부에게 정자와 난자 제공자를 연결시켜주는 업체도 등장했다.
1월 서울 서초동에 문을 연 'DNA BANK'는 최근 2개월 간 정자제공 신청자가 200여 명, 난자제공 신청자는 50여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 거래에 대한 윤리적 비난 가능성이 높은데다, 국회에서도 이를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 중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차병원 정형민 교수는 "장기 및 적출물 처리에 관한 법률이 있긴 하지만, 정자와 난자를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미국은 정자를 제공할 경우 '보상' 개념으로 보지만, 우리나라는 '매매'로 보기 때문에 정자 공여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즈메디병원 조종현 원장은 "안정적으로 건강한 정자를 공급하려면 국립혈액원과 같은 개념의 국립정자은행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외국에선...
'자위행위를 하면 돈을 드립니다', '키 170㎝, 체중 52㎏, IQ 143, 금발머리, 심리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입니다. 난자 필요하신 분 연락 바랍니다'. 미국의 대학 구내 게시판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광고문이다.
유럽에선 주로 정부기관에 의한 정자은행이, 미국의 경우는 상업적 목적의 정자은행이 운영되고 있다. 프랑스에는 정부가 관리하는 15개의 정자은행이 있으며, 중앙정자은행이 이들을 총괄한다. 미국에선 현재 150개 이상의 정자은행이 성업 중인데 한 번 정자를 제공하고 받는 돈은 40달러(약 5만 2,000원) 정도.
'캘리포니아 냉동은행' 같은 대규모 정자은행은 하버드, MIT, 컬럼비아, 스탠퍼드, 버클리 등 명문대생의 정자를 사기 위해 노력한다. 정자와 난자를 매매하는 광고도 공공연하다.
키와 체중은 물론, 눈 색깔, 성격, 지능지수(IQ) 등 공여자의 모든 신상 정보를 제공한다.
네덜란드 등 북유럽 일부 국가에선 냉동된 정자와 난자를 미국 등에 수출하고 있다. 세계 정자시장 규모는 5,000만~1억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정자 보관ㆍ운송 능력이 향상되고 인터넷 마케팅이 활발해지면서 국제 거래가 급증하는 추세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갖고 있는 덴마크인의 정자가 가장 인기가 좋다고 한다. 덴마크 크리요 정자은행은 호주, 미국, 동구권 등 25개 국에 정자를 수출하고 있다. 없어서 못 팔 정도라는 게 이 정자은행측의 설명이다.
고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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