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나, 웃는 입꼬리가 올라가야지 성공한다는 요지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웃을 때 양 입꼬리가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한 책이었다.그냥 재미있게 읽었었다. 얼마 후 오랫동안 만나왔던 선배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 처음으로 내가 그 언니의 입꼬리를 의식하면서 보고 있고, 그 입 끝이 아래로 처져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특별히 인상이 어떻다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 따라 그 언니 얼굴이 좀 심술궂게 생겼다 싶었고, 환한 느낌을 못 주고있구나 라는 품평까지 내심 했다.
이 대수롭지 않은 일화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학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꽤나 실감나게 알려주었다.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의 힘과 의미와 위험성을 동시에 봤다고나 할까. 또 하나, 입꼬리는 웃을 때 올라가야만 좋은 인상을 낳는다는 이 공식은 다른 사회문제들과는 달리 반론을 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올라가면 좋으니 안 올라가면 올라가게 만드는 게 사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만이 가능하다.
이 문제에 관심이 갔던 것은 다양성이니 개성이니, 또는 인간의 각기 다름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도 입꼬리뿐만 아니라 몸 이곳 저곳에 관해서는 이런 획일적인 논리가 판을 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최근 목격한 미국 문화의 단상이지만, 다인종 사회라 그나마 개성이 허락되는 얼굴을 제외하곤 여타 부분에 관한 미적 기준은 정말 살벌할 정도로 단일화해간다.
예를 들어 치아를 보면(이도 얼굴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황니인 내 치아나 다른 사람의 치아색에 대해서 별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하얗지 않은 이가 표준에서 벗어난,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미국적 인식에 길들여지면서 사람들의 이 색깔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미국에는 어떤 사람이 맘에 들어서 접근했다가 웃는 이가 누렇자 혐오스럽다는 듯이 등을 돌린다는 TV광고도 있다.
마치 옛날 코미디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웃는데 앞니가 하나 없는 꼴인 셈이다. 또한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는 탄력있는 엉덩이가 그렇게 중요한 섹시함의 상징인지도 몰랐고, 근육으로 탄탄하게 다져지지 않는 넓적다리나 위 팔이 그렇게 혐오의 대상인지도 몰랐다.
그저 살이 찌고 빠지거나 다리가 길고 짧고 정도의 기준으로 봤던 몸매가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수준이 되려면 이렇게 여러 가지 세부적 조건을 구비해야 했다.
문제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표준화된 세밀한 몸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 볼 때 늘 살피게 될 정도로 일상화하는데다 그 획일성에 도전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눈 코 입 생김이 다르듯이 치아색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고, 살은 좀 늘어져도 적당히 풍만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여지는 전혀 없다.
몸매나 치아색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고 관리하는 영역이라고 믿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육체미 운동이 퍼지면서 탄탄하게 근육질이 아닌 몸은 게으름의 상징까지 되어버렸으니 몸에 대한 이런 기준은 거의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가치기준까지 되어버린 듯싶다.
물론 이런 기준은 변화한다. 60년대 미국의 미인대회를 보면 살이 늘어질대로 늘어진 여성들이 나와서 미인임을 자랑하고 있다.
비록 변화는 하지만 그 추세는 몸 이곳저곳으로 더 세분화하고 더욱 획일화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에 미치는 미국의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기준을 의식하면서 살게 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지 싶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바로 나의 몸에서조차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권인숙ㆍ 미 사우스 플로리다 주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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