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출범한 일본 내각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고이즈미 총리는 최대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를 거의 배제하는 등 '나대로 인사'로 상당한 수준의 파격을 보였다.
이번 각료 인선의 특징은 여성의 과감한 등용과 민간인에 대한 문호개방, 기존 관행의 타파이다.
오기 치카게(扇千景) 국토교통성ㆍ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환경성 장관의 유임에 이어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 모리야마 마유미(森山眞弓) 법무장관, 도야마 아쓰코(遠山敦子) 문부과학성 장관의 기용으로 여성 각료는 사상 최다인 5명에 달했다.
특히 법무ㆍ외무장관 등 부총재급이 흔히 맡았던 중책이 여성에게 돌아간 것은 획기적이다.
민간에서 경제ㆍ재정담당 장관으로 발탁된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慶應)대학 교수는 대표적 구조개혁론자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의 '개인교수'이자,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의 자문회의 위원이다.
지금까지의 경제정책을 탈피, 구조개혁과 재정재건 등 발본적인 수술에 나서겠다는 신임 총리의 의지가 반영된 인사이다.
기존 인사 관행은 전혀 참고가 되지 않았다. 역대 자민당 내각은 파벌 분포에 따라 각료수의 2ㆍ3배수를 다선순으로 추천받아 총리가 적당히 골라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리가 부처별 후보를 1~3명 정해, 순서대로 전화를 걸어 승락하면 바로 선임했다.
최소한 조각 방법은 약속했던 '변혁'을 한 것이다.
대통령제를 방불케하는 이 인사방식은 많은 문제점도 남겼다. 파벌을 타파한다면서 자신의 세력기반인 모리(森)파를 적극기용한 게 우선 지적된다.
모리파는 공명ㆍ보수당과 민간인, 무파벌 인사를 제외한 11명 가운데 3명을 차지, 세력이 2배에 가까운 하시모토파 2명보다 도리어 많았다.
다나카 장관이나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행정개혁담당 특명장관의 기용은 총재선거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데 따른 논공행상이다.
이시하라 장관의 임명은 아버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지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등과 정권 운영면에서 밀약을 맺었다는 보도를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또 권한이 커진 3명의 관방부 장관 가운데 아베 신조(安倍晉三)ㆍ우에노 고세이(上野公成)의원 등을 유임시켜 주변을 모리파로 똘똘 에워쌌다.
여론에 밀려 침묵하고 있는 하시모토파와 에토ㆍ가메이파가 언제까지 이런 독주를 참고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
■日 외무장관 '다나카의 딸' 임명
일본 정계의 여걸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ㆍ57) 의원이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에 올랐다.
자민당 총재 경선과정에서 특유의 만담형 따발총 연설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 압승을 안긴 공로로 보아 당연한 입각이다. 그러나 외무장관 기용에는 논공행상보다 깊은 뜻이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최대 약점은 외교로 꼽혀 왔다.
그는 역사 교과서 문제가 한국과 중국과의 최대 현안인 가운데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집단 자위권 발언으로 갈등을 증폭시켰다. 또 중국과는 통상과 대만 문제까지 얽혀 있어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이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했다.
따라서 다나카 의원의 외무장관 기용은 한중 양국, 특히 중국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로 볼 수 있다.
과거의 은원을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으로 보아 미국에 앞서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통해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딸이라면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다나카 전 총리는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한 당사자이며 한국 정계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또 도쿄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李秀賢)씨 빈소에 이틀동안 찾아와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고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필라델피아 고교에서 3년간 공부했으며 와세다(早稻田)대 상학부를 졸업했으며 극단 '운(雲)'에서 연구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3년 남편인 나오키(直紀)씨가 참의원으로 가자 아버지 표밭에서 잇달아 3선을 기록했다.
초선 때 과학기술청 장관을 역임하기는 했지만 부총재급이 맡는 외무장관직에 오른 그가 어떤 정책을 추진할 지 주목된다.
도쿄=황영식특파원
yshwang@hk.co.kr
■도야마 日문부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 정권의 출범으로 잔뜩 흐려진 역사교과서 문제에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이 비추고 있다. 사회에 진출한 일본 여성의 상징이자 오랜 관료생활을 통해 전통적으로 보수색이 강한 문부성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도야마 아쓰코(遠山敦子ㆍ62) 전 문화청장관이 26일 문부과학성 장관으로 취임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부성 관료로은 처음으로 96년8월~99년10월 주 터키대사를 지내 외교 감각도 갖추었다는 점이 기대를 더하게 한다. 적어도 자민당 강경파인 전임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장관 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는 평가다.
그의 경력에는 언제나 '여성 1호'가 따라 다닌다. 도쿄(東京)대학 법학부 시절에는 문과 1계의 800명 동기 가운데 홍일점이었다.
문부성에는 최초의 고시 출신 여성 관료로 들어가 남성 관료의 틈바구니에서 발군의 결단력과 실행력을 자랑했다. 이런 노력으로 94년 여성 최초 문화청 장관(차관급)에 올랐고, 외무성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대사로 발탁됐다.
그는 "관료조직에서 한발한발 계단을 밟아올랐지만 한번도 여성임을 의식해 본 적이 없다"면서 "이상을 갈구하며 돌진하는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엔지니어인 남편과 연구자인 딸의 뒷바라지도 빠뜨리지 않는 충실한 가정생활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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