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26일,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군을 지원하던 독일공군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던 바스크 자치 정부의 수도 게르니카를 폭탄으로 도배했다. 파시스트 세력끼리의 군사적 협력을 노골화한 이 폭격으로 1,600여명이 죽고, 900여명이 다쳤다.그 해 5월24일에 개막될 파리 국제 엑스포의 스페인관(館) 벽화 제작을 의뢰 받은 피카소는 조국에서 날아온 비보를 듣고 밤낮으로 작업에 몰두해 한달만에 게르니카의 참상을 형상화한 벽화를 완성했다.
그는 이 작품을 '게르니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작품은 파리 엑스포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스페인은 예외였다. 내전이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나자 공화파였던 피카소가 이 작품이 조국에 반입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 '게르니카'를 조국에 보내겠다는 피카소의 뜻에 따라 이 작품은 81년에야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생전의 피카소가 바라던 대로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은 보관상의 문제로 92년에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겨갔다.
1936년 7월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주둔군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 이 내전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좌파와 우파를, 우파와 우파를, 좌파와 좌파를 분열시켰다. 예컨대 프랑스의 우파는 대개 프랑코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클로델이나 베르나노스 같은 가톨릭 작가는 파시즘과 스페인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당초에 프랑코의 반란에 호의적이었던 모리악도 결국 공화파 정부 지지로 돌아섰다.
좌파 내부에서도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분열했다. 승리는 파시스트에게 돌아갔다. 양심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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