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일 월드컵 공동주최가 결정되자, 타악 주자 박재천(40)씨는 일본의 폴리도(Polydor) 레코드사로부터 팩스를 한 통을 받았다.1991년 발표했던 2집 '사주팔자'를 리메이크 하자는 것이었다. 판소리에다 록을 접합해 만든 이 음반은 화합과 퓨전의 이념 그 자체라는 설명이었다.
'실크로드' 의 음악 하나로 세계의 이목을 모았던 건반 주자 기타로와 함께 새 시대의 판소리ㆍ정악ㆍ시조창을 만들어, 야니를 능가하는 아시아의 월드뮤직을 만들어 내자는 제의였다.
팩스에는 '농담이 아니다(Not comedy)'라는 첨언까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박씨의 대답은 '노(No)'. 자기복제는 할 수 없다는 예술가적 자존심, 우리 국악인 쪽에서 이런 제의가 먼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민족적 자존심이 뭉뚱그려진 답이었다.
국악과 양악을 한 몸에 체화, 나만의 음악으로 승화시켜낸 타악 주자 박재천씨의 행보는 세계를 겨냥한다. 주술적 음악에서 출발, 기복 신앙의 음악을 거쳐 세계로 나아가는 행로다.
지금껏 딱 여섯번 가 봤지만, 어쩌다 영화 제작자나 음악 동료와 노래방에 가면 그는 판소리 단가(목 푸는 소리)로 좌중을 압도한다.
중고시절 그룹사운드 활동, 대학과 대학원(중앙대 작곡과)에서 서양 현대 클래식, 군악대에서 팝 등을 섭렵했다.
그러다 대학원 2학기에 김소희의 판소리에 홀딱 빠진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전남 구례와 진도에서 먹고 살며 심청가와 무속음악의 원형을 팠다.
그에게 가장 큰 의미를 던진 사람은 색소폰 주자 강태환, 일본의 재즈 드러머 도가시 마사히코이다. 그들의 음악은 예술은 '영적 진실'에 맞닿아야 한다고 깨우쳤다.
그는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5대 5로 조합한 자기만의 타악 세트를 갖고 있다. 편종, 중국징(wind gong), 놋그릇, 꽹과리 등 동양적 전통 타악기와 봉고, 톰톰, 작은 북(snare drum), 심벌, 라틴벨, 카사바 등 서양 타악기는 기본이다.
여기에 서양 북의 가죽을 장구의 몸체에 접착시켜 만든 조율 가능한 창작 북까지 가세한다. 무게는 60㎏.
그의 음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영감은 피아니스트인 부인 박미연(33)씨의 음악이다. 같은 대학 작곡과 후배다.
최근 2년간 그는 부인과의 듀엣으로만 한국, 일본, 러시아 등지를 돌며 40회나 공연했다. 특히 지난해 러시아 페테스부르크의 전위 재즈 페스티벌인 SKIF(세르게이 쿠료힌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는 동양 유일의 출연자인 '프리 재즈 듀오' 로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다.
그의 국악적 프리 재즈에 쉬톡하우젠 등 부인의 현대 음악이 가세하자 6,000여 러시아 청중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무속 음악과 재즈가 그의 화두이지만, 사실 그는 모태 신앙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다음의 제5집 '예배' 에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찬미를 드리려 한다. 무게 200㎏의 큰 북 등 30가지 악기를 동원, 시편, 거룩, 평강, 송영 등 5곡을 솔로로 수록할 예정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재즈의 성인(Guru) 존 콜트레인처럼 '영원과 절대 진리에 도달하는 확실한 길'이다. 경기도 양수리 폐가에서는 오늘도 그들 부부의 음악이 끊이지 않는다.
장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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