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라는 말이 있다. '58년'을 발음할 때의 어감과 '개'에 관한 우리의 통념적인 이미지가 서로 겹쳐 가장 모멸적인 농담의 하나가 된 말이다.이 말은 대통령의 아들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역사적 우연'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를 자조하기 위한 그 세대 나름의 항변에서 시작된 것인 지도 모르겠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는 이 '58년 개띠' 남자들의 '개 같은 내 인생'을 조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거'에 대한 '비극적 드라마'에 근거해 읽는 것은 곤란하다. 소설 제목에 유의해보자.
이 소설의 키워드는 '마이너리그'이지 '마이너리거'가 아니다. 주요 인물인 4인방의 캐릭터가 강렬하지만 정작 작가가 그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거나 그것과 불화함으로써 그것을 조롱할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좌충우돌하는 행적 역시 풍자적 대상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문제적 개인의 함량 미달'을 문제삼아 이 소설을 폄하하는 것은 텍스트의 진실을 외면하는 처사다. '균형감각'이라고 해도 좋고 '소설적 아이러니를 극대화'했다고 해도 좋다.
이 '가차없는 시선'이 우리가 은희경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녀는 우리 사회의 '넘버 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동력을 모르지 않는 만큼이나 그들의 패배를 역사적 모순으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보잘 것 없게 만들어버리는 '시간의 비루함'에 관한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만수산 4인방'이 아니라 '시간'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핵심은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흐른 모양이다"(13쪽),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으며 하늘은 여일하고 무심했다"(82쪽)라는 처연한 문장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유장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1979년'도 또 '1987년'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 시간대는 다만 불현듯 맞게 되는 '소란 속의 침묵' 혹은 부지불식간의 '깨달음'에 버금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어떤가? 다시 '시간'은 흐른다. 소년은 노인이 되고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삶은 지속된다.'
'마이너리그'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화두는 바로 이 삶의 비애인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 "내가 끌고 가는 삶의 시간이 불현듯 뼛센 가시처럼 목구멍을 깊숙이 찔러왔다"(243쪽)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아득해지게 된다.
일찍이 서정인의 아름다운 단편 '강'이 자못 선연하게 보여준 진실도 그런 것이었다. 인생이란 "그가 처음 출발할 때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있기 마련이라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인생 자체가 '마이너리그'니까.
나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좋고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가 그저 그렇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가 또 그렇고 '타인에게 말걸기'가 좋다. 조금 다른 스타일을 시험한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말하건대, 이번 '마이너리그'는 은희경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단순한 찬사 이상이다. 그의 자리는 바로 여기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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