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조치일 겁니다." 대출금 연체경력으로 금융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신용전과 기록을 일괄말소한다는 발표가 나온 지난 주말, 금융권은 정부여당의 '화끈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대상자가 최소 100만명을 넘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대사면이었다.
그러나 경제란 화끈할수록 폐해가 큰 법. 은행권의 한 고위인사는 "당장의 신용불량자의 수는 100만명 이상 줄겠지만, 신용사회와 시장경제는 더 멀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금융은 신용이다. 신용이 있으면 돈을 빌리고, 신용이 없으면 돈을 빌릴 수 없는 것이 금융의 출발점이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신용상태를 꼼꼼히 따지는 금융기관과, 담보물건값이 신용을 대신하는 전당포가 다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개인의 신용전력(前歷)을 하향 평준화시킨 이번 사면은,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오던 금융기관의 신용평가기능을 스스로 무력화시킨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금융기관들이 연체기록만 있으면 무조건 대출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금액ㆍ사유ㆍ횟수를 막론하고 모든 과거를 덮어버리는 '묻지마' 사면은 누가 봐도 반(反)시장적이다. 미국 등 선진금융시장에서는 한번 신용에 상처가 나면 평생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물론 이번 조치엔 "제도 금융권의 문턱을 넘지못해 악덕 사금융의 횡포에 몸을 내맡기는 서민들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는 정책적 합리성도 있다.
그러나 형사범 특사(特赦)가 죄질과 형량을 고려하듯, 신용사면 복권도 연체금액이든 기간이든 최소한 경중(輕重)은 가리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다. 정치적 선정(善政)이 경제적으론 실정(失政)이 될 수도 있다.
경제부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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