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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봄꽃들도 '빨리빨리'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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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봄꽃들도 '빨리빨리'症

입력
2001.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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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온 나라가 꽃천지다. 진해의 벚꽃들은 이미 꽃눈물을 흘린 지 오래겠지만 서울의 벚꽃들은 이제 한창 흐드러졌다.내가 일하는 서울대 교정에도 요즘 벚꽃이 만발이다. 특히 내 연구실이 있는 자연과학관에서 도서관 뒷길로 이어지는 비탈에는 누군가 중요한 분을 환영 나온 듯 눈부시게 찰랑인다.

벚나무는 참 재미있는 나무다. 지금은 벌들이 잉잉거리며 꽃들을 찾지만 이제 곧 꽃이 지고 나면 벚나무는 개미들 차지가 된다.

벚꽃은 여느 꽃들과 마찬가지로 꽃 속 깊숙이 꿀샘이 있어 그곳을 찾는 벌들에게 단물을 제공하는 대신 꽃가루를 운반하게 한다.

그런데 벚나무는 꽃 속 외에도 꽃밖에 꿀샘들을 갖고 있다. 이파리 밑동마다 한 쌍의 꿀단지들이 달려 있다. 이른바 꽃밖꿀샘이라 부르는 그곳에는 개미들을 위하여 벚나무가 특별히 단물을 담아둔다.

꽃밖꿀샘을 갖고 있는 식물은 벚나무만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적지 않은 수의 식물들이 꽃밖꿀샘을 마련하여 개미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열대로 갈수록 훨씬 더 많은 식물들이 꽃밖에도 다양한 모습의 꿀샘들을 지니고 있다.

식물의 종류를 막론하고 꽃밖꿀샘은 모두 오로지 개미를 위해 마련한 기관이다. 개미가 집에 간 틈을 타 다른 곤충들이 가끔 들리기는 하지만 개미가 주된 고객이다. 당분을 얻는 대신 개미는 식물을 초식곤충들로부터 보호한다. 식물과 개미가 오랜 진화의 역사 동안 상생의 지혜를 함께 터득한 결과이다.

벚꽃 구경은 많이 해봤어도 벚나무에 꽃밖꿀샘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금년에는 벚꽃이 지고 난 후 파란 이파리들이 돋아나면 꽃밖꿀샘을 찾아 혀를 한번 대보길 권한다. 개미 밥을 뺏는 일이니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혀 끝을 감싸는 은은한 단 맛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벚나무에게는 또 한 가지 별난 속성이 있다. 이파리도 돋기 전에 벌거벗은 가지 위에 꽃부터 피운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겨울이 가기 무섭게 꽃잎부터 터뜨리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 산야를 둘러보면 성질이 급한 건 벚나무만이 아니다.

이른 봄 눈도 채 녹지 않은 새벽, 창밖에 무슨 인기척이 있어 내다보면 그 찬 공기에 저만치 비껴 서서 두툼한 털옷을 벗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북구의 여인 같은 꽃, 목련도 마찬가지다.

앙상한 가지 위에 덩그마니 꽃들만 벌거벗고 서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목련보다 늦게 피지만 워낙 온 사방에 피는 바람에 봄의 전령으로 불리는 개나리도 역시 꽃이 먼저 피는 식물이다.

모든 생물에게 번식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식물도 한 철 열심히 벌어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한 다음 꽃을 피워야 순서일 것 같은데 개나리, 목련, 벚나무들은 무엇이 그리 급해 번식부터 하고 보는 것일까.

필경 지난해에 미리 에너지를 아껴두었다가 새 봄이 오기 무섭게 목표를 달성하느라 온 힘을 다하는 것이리라.

심장 의학자 마이어 프리드만과 레이 로젠만에 따르면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모든 일을 조급하게 서두르는 사람들은 이른바 A 타입에 속한다. A 타입 사람들이 바로 교통사고도 더 잘 당하고 심장마비도 더 잘 일으키는 문제의 사람들이다.

B 타입은 A 타입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A와 B 외에도 전혀 야심이 없는 맹인 무직자들을 C 타입으로 애써 구별하기도 했다.

과학적인 근거는 물론 설득력도 별로 없는 분류지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결국 사전에까지 실린 개념이다.

어색하긴 하지만 비유를 하자면 우리 산야에는 별나게 A 타입 꽃들이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서 15년을 살았지만 한번도 봄이 이처럼 발악하듯 달려온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물었던가. 늘 가난과 역경 속에 살아야 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봄꽃들은 그렇게 발악하듯 봄이 왔음을 알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춥고 긴 겨울을 견뎌내고 한번 화려하게 불태운 후 일년 내내 또 내년 봄을 위해 허리를 졸라매야 한다.

시작은 요란하게 하고 이내 시들해지는 일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나 자주 벌어진다. 봄날 내내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한바탕 휩쓸고 가면 우린 텅 빈 뜰에 아카시아가 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봄꽃들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의 '빨리 빨리' 근성이 어쩌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긴 판소리 완창을 다 듣던 인내의 민족이라 하지만 과연 우리가 늘 그렇게 여유 있는 민족이었을까 의심해본다.

은나라 시절 소부와 허유가 정치 참여를 권유 받았을 때 냇물에 귀를 씻었다는 얘기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 당시 정치가 얼마나 썩었던 가를 말해준다.

우리 선조들이 줄기차게 느림의 미학을 찬미했다는 사실도 어쩌면 너무나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개탄하여 나온 것은 아닐까 싶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더라. 일촌의 광음도 가벼이 말라(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는 주희(朱熹)의 시를 즐겨 읽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슈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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