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家)는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끈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이다. 14세기에 메디치은행을 설립했고, 16세기에는 두 사람의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를 배출했다.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사후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의 손자 로렌조 데 메디치(1449~1492)는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막대한 재력과 권력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지원했다.
'메디치 가 이야기'(한은경 옮김)는 르네상스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메디치 가의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그린 역사서이다. 권력의 획득부터 상실과 복귀, 그리고 끝없는 추락까지를 다룬 메디치 가의 섬세한 가계도이자, 이들에 의해 만개한 르네상스에 대한 훌륭한 조감도이다.
저자 크리스토퍼 히버트(영국 왕립문학협회 특별회원)는 방대한 자료와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저자가 좇는 메디치 가의 기원은 '조국의 아버지'코지모 데 메디치부터 시작한다. 그는 전 유럽에 메디치은행의 지점을 설립했으며 신흥 상인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피렌체 공화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한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라"라는 경구는 인구에 회자됐고, 메디치 가는 이 때부터 피렌체 공화국의 제1가문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일 마그니피코'로렌조 데 메디치를 정점으로 피렌체 황금기를 구가하던 이 가문도 권력의 부침은 피할 수 없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나폴리 침략으로 메디치 가는 추방당하고 그들의 유산은 몰수됐다.
그로부터 18년 후 교황 레오 10세를 배출하면서 정계와 재계에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1737년 지안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대가 끊기고 말았다.
저자는 그렇다고 메디치 가문의 뒷조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 분출한 정신적 에너지와 르네상스 후견인으로서 역할에 주목했다.
이들은 회유와 협박, 배반과 모략 등 모든 정략을 총동원한 '마키아벨리'인 동시에, 스스로를 시인과 미술가로 부른 '미켈란젤로'였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품을 대하듯 서적을 수집했으며 미술관과 도서관을 공들여 지었다. 메디치 가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모든 인문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세웠다.
로렌조는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목신상을 보고 "노인은 치아가 완전하지 못한 법일세"라고 충고했을 정도로 감식안이 뛰어났다.
당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메디치 가문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들의 후원에 화답했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 보티첼리는 '동방 박사의 경배'에서 메디치 가 사람들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 받는 '비너스의 탄생'도 피렌체 교외에 있는 메디치 가 별장에서 그려졌다.
"르네상스 운동의 가장 중요한 발상지는 궁정이었지만, 이 운동의 대부분 후원자들은 돈 많은 상인과 자본주의 발달로 부를 얻은 신흥 세력이었다. 동시대 인물인 마키아벨리가 간파했듯이 이 부와 권력 융합의 대표적인 모델이 메디치 가였다."
책은 결국 여러 인문주의자, 정치가, 예술품 수집가들이 엮어가는 찬란한 르네상스 연대기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마키아벨리 등 수많은 천재들이 주도한 르네상스.
이들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 메디치 가가 있었고,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의 몰락과 함께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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