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9일은 그 해 2월28일 대구 경북 고교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돼 4월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으로 일단락된 4월 혁명이 그 절정에 이른 날이다. 혁명 과정에 산화한 180여명의 과반수가 이 날 목숨을 잃었다.그 이듬해의 5ㆍ16 쿠데타 이후 4ㆍ19는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고 불려 왔다. 그 실패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들은 이렇다.
이 혁명의 주력이 경제적 이해 관계에 둔감한 학생이었다는 것, 그들은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나 프로그램을 갖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내건 구호는 관념적이고 낭만적인 정치적 자유에 한정돼 있었다는 것, 그들은 정치 권력을 잡을 의지도 역량도 없었다는 것 등.
그러나 이와는 다른 관점에 설 수도 있다. 예컨대 4월 혁명은 비록 학생이 이끌기는 했으나 민중 운동의 성격을 지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5ㆍ26일에 거리로 나온 서울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학생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런 해석을 옹호한다. 게다가 4ㆍ19를 갑오농민전쟁에서 시작돼 미래의 통일된 자주ㆍ민주 국가 수립으로 완성될 한국 혁명의 한 계기적 국면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럴 때 4ㆍ19는 3ㆍ1운동, 6ㆍ10 운동, 광주 학생운동과 5ㆍ18, 6월 항쟁 등을 잇는 징검다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4ㆍ19를 노래한 시 한편.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 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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