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의 파고를 높인 미군 첩보기 사태는 결국 '말의 게임'으로 끝났다. 첩보기에 부딪힌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실종되고, 승무원 24명이 탄 최정예 첩보기가 중국 수중에 들었으니 군사적 긴장이 감돌 만도 했다.그러나 텍사스 출신 카우보이 대통령은 권총집에 손도 대지 않았고, 중국의 와일드 웨스트라는 하이난 섬의 총잡이들도 여유작작했다. '하이난의 결투'답지 않았다.
서부 영화에서도 진짜 총잡이들의 대결은 침묵 속의 기싸움이 구경꾼을 압도한다. 21세기 세계 질서를 양분할 것이란 두 강대국이 우연히 맞선 이번 사태도 본질은 비슷했다.
다만 안팎의 여론을 상대로 명분을 다툰 양쪽의 정치 논리가 거물들 답지 않게 치열한 말싸움에 매달리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의 게임은 미국이 중국 조종사 실종에 대해 '유감', '미안', '대단히 미안'등으로 물러 선 것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절묘한 수사학이란 찬탄도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특히 미국이 은밀하게 벌인 여러 형태의 말의 게임을 뜯어 보는 것이 사태 본질 파악에 도움될 것이다.
미국은 첩보기가 국제 공역에 있었고 조난 당한 점을 들어, 기체와 승무원을 즉각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언론도 첩보기의 영공 침범여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정찰기(reconnaissance plane)로 부르는 비행기가 고도 능력을 가진 첩보기(spy plane)란 점이었다.
이 첩보기는 중국 내륙 깊숙한 곳의 무선 통신과 레이더 전파, 전화, 팩스, e-메일 등 모든 신호 정보를 도청해 해독한다.
이런 첩보기가 중국 연안 접근을 방해하는 전투기를 추락시켰으니, 명분과 현실에서 애당초 미국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이런 불리를 잘 아는 미국은 첩보기의 의미를 왜곡하는데 주력했다. 중국이 러시아에서 도입한 신예 구축함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 그 예다.
중국 해군력 증강을 감시하는 통상 정찰 활동임을 부각시킨 것이다. 중국의 핵실험 준비를 감시 중이었다는 보도는 또 다른 맥락의 흑색 선전이다. 또 첩보기 활동 자체가 국제법상 인정된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그런 법이나 국제 협정은 없다. 오히려 첩보기가 접근하면 국제 공역이라도 요격해 멀리 내쫓는 것이 관행이다.
흔히 영공을 넘나드는 첩보기를 공격해도 크게 시비하지 못한다. 소련이 대한항공 007기를 미 공군 RC-135 첩보기로 오인해 격추한 것은 이미 알려졌지만, 미ㆍ소는 상대 첩보기를 여러 대씩 격추하고도 서로 덮어 두었다는 설도 있다.
북한이 60년대 말 미 첩보기 EC-121 기를 격추했을 때 미국은 무력 시위에 그쳤고, 첩보선 푸에블로호 나포 때는 공식 사과하는 수모를 무릅쓰고 겨우 승무원을 돌려 받았다.
중국이 조종사 실종을 부각시킨 것은 이에 대한 사과를 받는 선에서 타협할 의도로 비쳤다.
미국은 조종사 왕웨이가 위험한 근접 비행을 즐긴 인물이라고 선전했으나, 요격기들이 수십 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수신호를 하는 것은 예사로운 관행이란 점을 미국 전문가들도 인정한다. 결국 미국은 사과 수준을 낮추려는 마지막 시도 끝에 슬그머니 예정된 타협 수순을 택했다.
이런 게임 결과에 대한 판정은 엇갈린다. 양쪽이 원만한 타협을 이룬 '윈ㆍ윈 게임'이란 평가가 있지만, 중국이 물정 모른 채 큰 소리치던 부시 대통령에게 교훈을 가르쳤다는 풀이도 유력하다.
경험 없는 부시가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는 자화자찬성 평가도 나온다. 중국 지도부도 자존을 지키면서 타협을 택하는 대인의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와, 대미 교역 등 숱한 제약을 안은 '종이 용(龍)'임을 드러냈다는 해석이 엇갈린다.
그러나 판정보다 중요한 것은, 두 나라가 말의 게임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올바로 인식하라는 충고다.
국제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대결 대신, 대화와 협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미국에서도 높다. 승무원이 돌아오자 치사하게 다시 언성을 높이거나, 괜한 항공모함 배치설을 흘리는 것 등은 부시 행정부가 아직 교훈과 충고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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