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의약분업은 '긁어 부스럼'이었던 것 같다. 심각한 의약품 오남용의 문제에 대해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의약분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너무 이상론에 치우친 발상이었다. 갖가지 이해관계가 난마와 같이 얽혀 있는 현실에서 고매한 이상은 설 자리를 찾기 힘들다.그 동안 의약분업의 공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들이 많았다. 건강보험 재정에 생긴 4조원의 적자가 의약분업 탓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어쨌든 분업 실시와 더불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일반 국민이 그 적자의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의약분업 때문에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찾아다니는 데 드는 시간과 관련된 비용이다. 어림잡아 병원을 한 번 찾을 때마다 종전보다 반시간 정도 더 걸린다고 가정하자. 작년 한해 병원 방문 횟수가 약 3억 4,000만회였다니 모두 1억 7,000만 시간이 더 들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해 의약분업으로 인해 생산활동이나 여가활동에 쓸 수 있던 1억 7,000만 시간이 길가에 버려진 셈이다. 한 시간의 화폐가치가 1만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의 화폐가치는 무려 1조 7,000억원에 이른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 시간과 관련된 비용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래도 앞에서 말한 4조원의 재적정자는 순전히 낭비된 돈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 가닥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한 주머니(일반 국민)에서 나와 다른 주머니(의약계)로 옮겨가 그들의 소득이 되었으니 말이다. 반면에 1조 7,000억원에 이르는 시간비용은 아무 쓸모 없이 길가에 버려진 것이라서 더욱 아까울 수밖에 없다.
의약품 오남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의약분업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기존 체제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항생제 판매 규제를 더욱 강화한다던가, 의사가 처치한 내용을 환자에게 알리도록 의무화하는 방법 등이 있을 수 있다. 얼마나 효과적일지 자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의약분업에 따른 혼란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 실정을 잘 생각지도 않고 선진국의 제도를 그대로 본따려 한 데 있었다. 의사가 처방과 조제를 겸했던 과거의 체제에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제점만 많았다면 그 체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리 없다. 선진국에 비해 다소 뒤떨어진 점이 있다 해도 우리로서는 그런대로 좋은 체제였다.
더군다나 의약품 오남용 문제를 의약분업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잘못된 현실 진단의 결과였다. 의약품 오남용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낙후된 의료문화에 있다. 사소한 감기에도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처방해야 명의라는 소리를 듣는 풍토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의약분업이 실시된 후에도 오남용은 여전한 현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의약분업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고 예전의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새 체제에 적응해가기 시작한 터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더 큰 혼란만을 가져올 따름이다. 이제는 새 체제를 현실로 인정하고 문제점을 보완해 가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 일을 통해 정부는 무조건 개혁의 깃발만 올리고 보자는 '개혁 한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 동안 의료개혁, 교육개혁 등 개혁을 한답시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낸 경우가 수없이 많다. 이런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아야 그 동안의 혼란에서 최소한의 위안을 찾을 수 있다.
/이준구ㆍ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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