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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집 '밥상위의 안부' / "안보이십니까…농민들의 멍든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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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집 '밥상위의 안부' / "안보이십니까…농민들의 멍든 가슴이"

입력
2001.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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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영원한 '소수민족'일 수밖에 없는 농민들, 오늘날의 저 거대 도시를 키워온 늙은 농부들, 그들만이 가진 근육질의 삶에서 묻어나는 슬픔과 분노의 근원을 노래하고자 했건만."경북 영천에서 농사를 짓는 이중기(41ㆍ사진) 시인이 두번째 시집 '밥상 위의 안부'(창작과비평사 발행)를 냈다. '식민지 농민'에 이어 9년만에 묶은 시집이다.

자신의 말처럼 그의 시들은 '이 땅의 영원한 소수민족'인 농민의 입장에서 쓴 분노의 언어이다. '십이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거두절미하고 귀싸대기부터 올려붙였다/이놈아, 어쩐지 제삿밥에 뜬내나더라/./이런 쳐죽일 놈! 뭐라꼬?/쌀농사는 돈이 안된다꼬?/물려준 땅 죄다 얼라들 주전부리나 할/복숭아 포도 그딴 허드렛농사만 짓고/뭐? 쌀을 사다 처먹어?/./이노옴, 내 논, 내 밭 다 내놔라아!'

그의 시 '통쾌한 꿈'은, 다소 직설적이긴 하지만 이 시집의 세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비교우위론으로 개방된 한국 농촌, 자본의 논리에 투항해버린 상업영농 일색의 정책 때문에 500만 농가가 그 삶을 바탕해온 전통 쌀농사가 사라져버리는 현실을 제삿날 나타난 아버지의 꿈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올지라도/농사꾼은 맨몸으로 들에 나가지 않는' 농민의 삶이 배반당하는 현실이 고통스럽다. '오늘도 식당밥으로 점심을 이우셨군요/은유와 상징으로 맛보신 농촌은 어떠했나요/./언뜻 젓갈냄새 풍기는 김치쪼가리/걸쳐 먹은 밥 몇숟갈에서/몸파는 어린 조국의 안부를 들었습니까//오늘도 밥상 위에서 안부를 묻습니다/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입니까' 표제시는 통렬한 표현으로 농촌 현실에 눈먼 도시인들에게 묻는 안부이다.

그의 시집에는 이런 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파꽃 한번 오지게 둥둥둥 피어난다/거두절미하고 사내의 힘찬 거시기 같다/욕망의 수사를 생략하며 파꽃의 절경에 젖은 늙은이/저 늙은이 파안/저승꽃 만발한 서러운 절창!//세상 참 환하다'('참 환한 세상' 부분)처럼 간난의 농촌 삶에서도 파꽃이 피듯 일렁이는 경이의 순간을 포착한 아름다운 서정의 시들도 함께 있다.

영천 금호강가에서 20여년 농사를 짓고 있는 이씨는, 많은 농촌 출신 시인들이 있지만 사실상 다른 꿈들을 찾아 떠나는 현실에서 피폐해지는 농촌을 지키며 홀로 '왼새끼를 꼬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농촌ㆍ농민시를 쓰는 사람으로 불린다. "빚에 쪼들리다 목숨을 버린 많은 젊은 농부들에게 나는 살아서 부끄럽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새 시집은 그 부끄러움에서 길어올린, 가파를 정도로 싱싱한 언어로 빛난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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