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13일 1만여명의 인도인들이 인도 북부 암리차르시의 영국군 요새 앞 자리앙와라 바그 광장에서 정치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의 인도 탄압법인 롤래트 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제1차세계 대전 중에 전쟁 수행을 위해 인도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영국은 그 기간동안 인도에서 유화 정책을 펼쳤으나, 전쟁이 끝나자 태도를 바꾸어 인도의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을 크게 강화하던 참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애초부터 인도를 독립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실낱 같은 독립의 희망을 품고 영국에 협력해서 전쟁을 수행했던 인도인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은 당연하다.
이 날 영국군은 이들 비무장 인도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영국군의 발포로 4천명 이상이 죽고 1천여명이 부상해, 자리왕가라 바그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영국군은 처음부터 단순히 시위대를 해산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학살하겠다고 마음 먹은 듯했다.
광장의 출구가 하나뿐이어서 영국군의 발포에 놀란 시위대가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다. 3ㆍ1 운동 한 달쯤 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엄격한 보도 통제로 계속 은폐되다가, 이듬해 인도 국민회의파에 의해 그 진상이 공표됐다.
학살 사건 이후 영국은 인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채찍형ㆍ태형(笞刑) 등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도입해 인도인들을 모욕했다.
그 형벌 제도의 도입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영국 어느 곳의 초등 학교에서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며 '남성적으로'키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암리차르 학살 사건과 그에 이은 인도인 탄압은 오히려 간디를 중심으로 한 비폭력 저항 운동의 기폭제가 되면서 인도인의 독립 열망을 북돋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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