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전에 비해 이 도시가 아주 밝아지고 정비되었음을 볼 수 있다.제정시대의 화려한 건물이 수리되고 야간조명 시설이 늘어나고 현대식 쇼핑센터와 국제 수준의 고급호텔이 세워지는 등 900만 인구를 헤아리는 이 수도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손색없는 국제도시로 용약(勇躍)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스크바의 번영은 노브고로드의 퇴조와 비교하여 더욱 대조적으로 보인다. 7월 15일 아침, '새로운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고도(古都)에 도착했을 때 잔뜩 흐려 있던 하늘은 끝내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우산 아래 돌아다녀 본 노브고로드는 굳이 날씨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고 건물이고 왠지 풀죽어있는 듯한, 뚜렷한 산업 기반도 없는 인구 20만 남짓의 소도시였다.
러시아 역사의 초기에는 두 도시의 위상이 정반대였다. 러시아 최초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노브고로드는 종횡으로 이어지는 수로 교역망의 중심지로 수세기 동안 번성했으며 러시아 북부, 동북부(이 때의 러시아는 물론 우랄산맥 서쪽을 말한다)에 걸치는 광범한 세력권을 형성했다.
이 도시는 발트해에 가까이 위치한 덕에 독일, 스웨덴 등 서유럽 사회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볼호프강을 사이에 두고 소피아성당과 마주 보는 지역에는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의 거주지뿐 아니라 그들의 독자적인 교회(로마 가톨릭교회 소속)까지 허용되었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노브고로드는 민회(베체)의 권한이 강하여, 공과 행정관이 모두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민회는 주로 토착귀족과 거상(巨商)인 세력가들이 좌우했기 때문에 노브고로드는 일종의 상인 과두정을 형성하고 있던 도시국가였다.
역사학계에서는 도시 노브고로드와 이 도시 지배 하의 지역 일대를 '노브고로드공화국'이라 칭한다.
당시 노브고로드인들도 자부심이 대단하여 '주권국 대(大)노브고로드'라 자칭했다.
공의 권한이 약한 만큼 도시 유력집단 사이의 권력투쟁이 빈발했는데, 행정관이 쫓겨나고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전반적인 정치적 분위기는 떠들썩하고 역동적이었다.
이에 반해 모스크바는 1147년 수즈달 공령의 통치자이던 유리 돌고루키의 별장촌으로 세워진 이래, 오랫동안 한산한 시골로 머물러 있었다.
비약적인 발전의 기회를 잡은 것은 몽골 지배기에 들어서서였다. 여기에는 역시 수로를 통해 사통팔달 연결되는 모스크바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도 한몫 했지만, 이 도시의 성장은 금장한국 칸들에 대한 모스크바 공들의 적극적인 협력정책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13세기 후반부터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 대공인 알렉산드르 넵스키 막내 아들의 영지가 되었는데, 돈주머니(칼리타)라는 별칭을 가진 이반 1세 이래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고, 1432년에는 마침내 대공령의 수도가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모스크바 군주들은 이렇게 세력이 성장하는 동안 몽골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억압하면서 몽골 칸들에게 철저한 굴신(屈身)의 자세를 취했다.
대공럭坪?되려면 금장한국 칸의 인가를 받아야 했기에, 이를 위해 러시아 통치자계급은 자기네 사이에서는 물고 뜯고 싸우면서도 칸에게는 최대한의 아부를 바쳤다.
블라디미르 대공 - 모스크바 대공은 이 과정에서 칸의 군사력을 빌어 대공지위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 대공은 나아가?칸에게 바칠 조공과 기타 세금의 징수권을 획득했다.
이것이 대공의 위신을 크게 높여 주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더 큰 소득은 모스크바의 경제력 강화였다.
대공들은 칸의 신임을 바탕으로 군사력, 행정력을 강화하면서 영토확대 정책을 계속해 갔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들은 러시아 내에서 확고한 1인자가 되고부터는 금장한국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고, 첫 도전(1380년 쿨리코보전투) 후 꼭 1세기만에 이반 3세는 몽골 지배 종식을 선언했다.
칸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칸을 타도하게 된 것이다. 기회주의도 이만저만한 기회주의가 아닐 수 없는데, 물론 모스크바 대공들이 처음부터 이 모든 과정을 예견하고 사태를 그 방향으로 주도해 간 것은 아니겠지만, 알렉산드르 넵스키 가문의 유전자에 들어있는 철저한 권력본능이 마침내 모스크바를 전 러시아의 통일과 독립의 주역으로 만드는데 한몫 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모스크바는 그 후 오직 전제적인 군주만을 받들게 되었다.
노브고로드는 몽골군의 직접적인 침략은 겪지 않았지만 역시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간접지배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대한 노브고로드인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아서, 그들은 몽골 지배 초기이던 1257년 세금을 징수하러 온 몽골인 관리에 대한 봉기를 조직했다.
이 봉기를 진압하고 금장한국의 세금징수를 위한 편의를 적극 도모해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러시아인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였다.
당시 블라디미르 대공이면서 노브고로드 공을 겸했던 그는 1240년 네바강가에서 스웨덴 군의 침공을 격퇴한 공로 덕에 넵스키('네바강의'라는 뜻)라는 칭호를 얻기는 했지만, 몽골에 대한 자세에서는 굴신의 전형이었다.
모스크바 쪽에서 엄청나게 미화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오늘날 노브고로드에서 인기없는 역사적 인물이다.
노브고로드는 저항의 분쇄 이후에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번성하였고, 자치의 전통도 여전했으나, 러시아 전체의 정국을 주도할 세력기반은 상실해 버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세력강화에 성공한 모스크바 대공이 노브고로드의 자치권을 박탈하려 들면서 발생했다. 양자 간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반 3세는 가톨릭국인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얻어 저항코자 하던 노브고로드 자치파를 군사력으로 분쇄하고, 이 도시를 자신의 군주권 아래 강제로 복속시켰다.
자치의 상징이던 민회의 종은 끌어내려져, 오늘날에도 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모스크바측은 이 같은 철저한 억압에도 안심할 수 없었던지, 16세기 후반 이반 4세는 오프리취니나라는 구(舊)귀족 억압정책의 와중에서 노브고로드를 초토화시키고, 남아있던 토착세력을 박멸하였다.
그 후 노브고로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소도시로 주저앉아 버렸다.
우리를 안내하던 노브고로드대학 역사학과 대학원 여학생은 공의 거처 옆 빈터가 민회장소였다고 말해 주었다.
그 며칠 후 찾아간 고대로마의 민회장소(포로 로마노)는 폐허이긴 하면서도 자신에게 주목할 것을 강요하듯 압도적인 당당함을 과시하고 있었음에 반해, 자치와 경제적 번영을 빼앗긴 노브고로드의 옛 민회장소에서는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비에 젖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노브고로드의 역사적 의미는 소멸되고 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 정치- 문화사의 출발지로 다루어져 왔던 키예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로서 러시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지금, 러시아 역사학계는 키예프를 대신할 역사적 전통을 찾고 있다.
노브고로드는 순수 러시아 민주주의적(물론 노브고로드 민회의 민주주의는 현대적 민주주의와는 달랐지만) 전통, 전제정과 외세에 맞선 저항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이유에서 러시아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노브고로드는 앞으로 역사서술에서는 다시 찬란한 번영을 누릴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너무 기회주의적인 것일까.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볼호프강변 건물들이 옛 노브고로드 榮華를 증언
모스크바가 갈수록 번창하는 것과 달리 노브고로드는 침체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고층건물도 없으며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다.
화학비료를 생산한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내세울 산업도 없다. 밤 모습은 더욱 그렇다. 밤에 거리구경이라도 나섰다간 가로등도 드물고 문 연 가게도 거의 없는데다 행인까지 없어 숙소로 돌아오는데 애를 먹을 정도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가 있는만큼 볼호프강을 따라 펼쳐진 건물들은 과거의 영화를 충분히 짐작케한다.
강변 건축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크렘린(성벽)이다. 11세기에 목재로 처음 축조된 것을 15세기에 지금과 같은 붉은 벽돌로 개축했다.강이 내려다보이는 크렘린에는 성소피아사원과 역사박물관이 있다.
1050년 건축된 성소피아사원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초기 러시아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러시아 1,000년 기념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역사박물관은 1층에는 과거 노브로고드공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물품이, 2층에는 종교화가 전시돼있다.
중세에는 성화와 벽화 화가들이 노브고로드파를 형성할 정도였다. 강 건너편에는 성 니콜라스대성당도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볼 호프강은 일멘호에서 흘러와 라도가호에 이르는 길이 228㎞의 큰 강이다. 폭이 수백미터나 되고 수량도 풍부해 1926년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가 하류인 볼 호프시에 건설되기도 했다.
이 강은 노브고로드 주민들에게는 좋은 휴식처이다. 왕복1시간이 걸리는 유람선을 타면 볼 호프강과 강을 따라 펼쳐진 노브고로드 옛시가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 북서쪽 530㎞ 거리. 기차로 달려 9시간만에 닿는다. 다시 북서쪽으로 3시간(180km)을 달리면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연결된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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