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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행] (2)정도전 '삼봉집'-경기평택시 문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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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행] (2)정도전 '삼봉집'-경기평택시 문헌사

입력
2001.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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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공종(儒宗功宗). '선비에서도 으뜸이요, 공적에서도 으뜸'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ㆍ1342~1398)의 사당, 문헌사(文憲祠)는 고종 때(1872년) 이르러서야 지어졌다."30년 긴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삼봉이 이방원에게 참수당할 때 남겼다는 시, '자조')

조선 시대 내내 삼봉은 대역죄인이었다. 어린 세자(방석)를 끼고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 광해군 때 허균이 역모죄로 체포됐을 때 정도전의 시를 좋아했다는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삼봉집 목판본이 있는 경기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문헌사.이곳은 정도전의 후손이 사는 250호 규모의 집성촌이다. /오대근기자

삼봉 후손의 집성촌인 경기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자리잡은 문헌사는 고종 때 삼봉의 복권을 계기로 세워져 1912년 현재의 자리로 이주해왔다. 삼봉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삼봉집 목판본을 소장한 목판고 두 채만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단출하다.

문헌사 앞은 경부고속도로였다. 봄이 오는 논밭 위를 고속도로가 힘차게 뻗어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패하지 않았다면, 그의 후손 집성촌은 그가 설계하고 꿈꾸었던 서울 어디쯤 위치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조선 역사에서 외면당했지만 그 500년의 씨앗을 잉태한 것이 삼봉의 30년 공업이었다. 억불숭유라는 조선의 기본 이념을 비롯해서 조선의 법, 정치, 경제, 군사, 문물제도의 기초를 닦았고 경복궁과 서울의 도심설계, 4대문 4소문과 동네 이름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조선경국전). '역성혁명'을 가능케 했던 급진적 민본주의 사상으로 난세를 돌파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연 삼봉의 이상과 자취가 '삼봉집' 에 들어 있다.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억불숭유의 이념을 제시한 '불씨잡변' 등의 이론서와 시, 수필 등이 담겨있다. 그의 생전에 처음 간행됐다가 그후 계속 증보돼 정조 때(1791년) 완벽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문헌사 내 목판고에 있는 삼봉집 목판본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14권 258판중 236판이 소장돼 있다.

철학 법 정치 군사 경제 등 한 사람이 이룩했다고 볼 수 없는 그의 위업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예부터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이니 구차한 삶은 처할 바 아니지 않나." (고려말 친원파에 밀려 나주 유배시에 남긴 시 '감흥')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비장한 현실주의였다. 하늘에 묻고 답하는 내용을 담은 짤막한 철학서 '심문천답'(心問天答)에서 터뜨린 분노도 이런 것이었다. "명(命)을 배반하며 거역하고도 장수와 영달을 얻는 자는 하늘이 무엇을 사랑하여 후하게 대한 것이며, 명을 순종하고도 요절과 빈천을 얻은 자는 하늘이 무엇을 미워하여 박하게 한 것입니까."

왜 현실에서 의(義)는 승리하지 못하는가. 이 고전적 고민에서 하늘의 이름을 빌려 삼봉은 자답한다. 하늘은 "(인의를) 낳기는 하나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천명의 몫이 아니라 사람의 몫인 것이다. 변덕스런 운명의 홍수에 둑을 만들어 그것을 제압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 했던 냉철한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 삼봉은 조선의 마키아벨리였다.

비장한 실천적 지식인의 눈에 비친 당대 선비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아무 일도 없을 때는 큰소리로 공갈쳐서 왕의 은총을 받고, 적군을 만나면 적군이 일으킨 먼지만 보아도 먼저 달아나"는 허세 뿐인 위선자였다. (농부에게 답한다ㆍ答田父) 삼봉이 불교를 비판한 것도 부패한 실상이 문제였지만 '인과응보'의 현실순응을 깨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스승 이색, 절친한 동료였던 정몽주. 혁명의 순간 이들과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인 삼봉은 결국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 패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현실주의적 통찰은 여전히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염치를 알고 창고가 가득 차야 예의가 일어난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조선경국전).

1995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비를 세울 때 누가 가장 적당하냐는 논의가 일었을 삼봉이 최고의 답이 됐다. 종묘 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사당 관리를 맡고 있는 삼봉의 18대 손인 정종봉씨는 "방학 때면 학생들도 많이 찾는 등 선생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는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영웅호걸형 선비로서 붓은 문명개혁의 고전을 만들었고, 칼은 썩은 왕조를 도려냈다"고 평가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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