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잘 풀리는 시기에는 전망 지표들도 거듭해서 상향 수정된다. 그럼에도 전망이 실적을 따라가지 못하기 일쑤다.재작년과 작년 상반기까지 우리 경제가 그랬다. 각종 기관에서 예측치를 몇 번씩 뜯어고쳤지만 끝내 최종 실적을 하회했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가 요즘 같은 상황이다. 성장 물가 실업 등 대내외에서 나오는 각종 전망들이 꼬리를 물며 하향 수정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올해 우리 경제가 지금의 예상보다 더욱 나빠질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흉조다.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정부의 경제 전망은 물정 모르는 뚱딴지이거나, 잘해야 원님 행차 뒤 나팔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정부가 최근 들어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하다. 언론의 과도한 비판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느니, 심리 안정이 관건이니 하는 따위의 본말전도(本末顚倒)적 발언들이 쑥 들어간 것만 해도 진일보다.
하기야 지금 같이 빤한 국면에서는 과거의 말 지우기, 개구리 입 되기가 오히려 '유능한 관리'의 척도일 것이다.
이제 걱정스러운 것은 당국자들이 청와대 눈치만 살피며 몸조심으로 일관하는 낮은 포복자세다. 근래 몇몇 설문조사에서 기업심리나 판매지수 등이 다소 호전된 것으로 나타나 이들의 진퇴양난 입장이 더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체감경기를 살리겠다며 지난해 말부터 우격다짐으로 밀어부친 '자금 펌프질'이 애초부터 시장왜곡과 지표혼란을 초래하기 십상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크게 숲을 보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경기 감속이 진행되고 있는 판국에 우리 같이 절대적인 대외 의존형 경제가 혼자서 무슨 용 빼는 재간이 있을 수 없다.
미국과 일본 경기의 침체 여파는 이미 정보통신분야의 수출 감소, 환율 등 금융시장의 동요, 외국인직접투자(FDI) 격감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마당이다.
1분기에 경기가 바닥을 친다느니, 하반기부터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니 하는 낙관론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엊그제 대통령 주재 경제장관 간담회 분위기가 심히 진중했다는 소식은 이런 점에서 국민들에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뉴스다.
지금 우리 경제는 이른바 'IMF 3년차 증후군'을 4년차에 비로소 맞게 되는 중대한 위기 시나리오를 상정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비상한 경각심과 대비 태세'라는 말이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것이다.
멀리 중남미 국가가 아니라 바로 이웃 일본이 어떤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침체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난 10여년간 재정 금융 산업 등 백방의 정책을 폈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됐고, 구조조정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경제가 일어설 듯 하다가 번번히 주저앉고만 결정적 이유는 과단성-지속성의 결여 때문이다.
백화제방식으로 온갖 처방을 구사했으나 한마디로 '깔짝대는'수준이었다. 그 결과 정책의 약효는 무디어지고 불황 바이러스의 내성(耐性)만 키운 꼴이 됐다.
일본도 10년 전 불황진입 초기에는 '거품' 해소의 통과의례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우리는 거품 대신 환란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경기와 상시개혁시스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가 아찔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정부는 분명하게 '선택과 포기'를 해야 한다. 성장 물가 환율에 대한 욕심과 구조조정까지 모든 선(善)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은 그야말로 위선 아니면 무모함이다.
이것은 말이 좋아 정책의 균형이고 상생의 원리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적 이치다. 지난 97년 원화 환율을 방어하려다 더 큰 사태를 부른 것도 다다익선을 좇다가 화를 입은 가까운 예다.
섣불리 정책 조합이니 유연성이니 내세우다가 죽도 밥도 안되고 그 함정에 빠진 것이 일본의 경우다. 불황과 위기를 헤쳐가는데 최대의 걸림돌인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열도 이런 데서 비롯된다.
송태권 논설위원
songt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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