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가 19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을 조만간 탈퇴할 것을 기정 사실화함으로써 수 십년 동안 '공포의 균형'을 유지해온 세계 핵 및 군축질서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미사일 요격 시스템의 제한을 규정한 ABM은 핵탄두 운반수단의 숫자를 제한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함께 냉전 기간 중 세계의 핵전력을 안정시켜온 양대 축이었다.
때문에 ABM의 붕괴는 SALT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등 기존 체제의 해체까지 이어질 수 있으며 핵 2대 강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협정을 추진하지 않고 대립한다면 자칫 각국이 핵과 미사일을 아무런 제약 없이 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은 ABM을 개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파기를 선언할 태세이기 때문에 군축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러시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이 ABM을 파기할 경우 옛 소련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을 부활하겠다고 경고해왔으며, 중국도 20~30개에 불과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대폭 확대할 의지를 보여왔다.
미국의 ABM 파기는 자국 본토를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구축과 직결돼 있다. 부시 행정부는 NMD 구축을 집권의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왔으며, 이를 추진하기 위해 국제법적 걸림돌인 ABM을 개정할 수 밖에 없다고 강변해왔다.
특히 헤리티지 재단 등 보수적 싱크 탱크들은 소련의 붕괴로 조약 당사국이 사라진 만큼 조약의 일방적 폐기도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은 오는 6월 이전에 지상, 해상, 우주 등 사실상 지구전체를 망라하는 NMD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조약 파기는 부시 대통령이 지난 달 표방한 '신현실주의(new realism)' 외교 노선의 반영이기도 하다. 즉 '힘과 국익'의 차원에서 볼 때 러시아는 더 이상 미국과 대등한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조약 개정이 아니라 아예 파기를 선언하겠다는 심산이 담겨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러시아의 핵무기 감축 및 핵 물질 안전 확보를 위한 예산지원을 재고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등 '독자적인 핵질서 구축'을 사실상 추진하고 있다.
한편 미국이 ABM 무력화와 NMD 추진 의지를 명백히 밝힘으로써 지난 달 한ㆍ러 정상회담에서 ABM의 유지ㆍ 강화를 공동성명에 명시했던 한국은 더욱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ABM 조약이란
탄도탄요격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ㆍABM) 조약은 1972년 미국과 소련이 상호 핵개발 경쟁을 억제해 상호확증파괴(MAD)를 피하자는 공통의 이해에 기초해 체결한 것으로, 양측의 요격미사일 개발과 배치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조약 3조 a, b항은 "상대국 수도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기지 150㎞ 이내 지역에 요격미사일을 100기만 배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도 74년에는 두 곳 가운데 한 곳에만 배치하는 것으로 강화됐다. 우주공간에서의 이동식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다. 또 조약 9조는 ABM 체제를 다른 나라에 이전하거나 관련 기지를 배치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 이라크등 이른바 '깡패 국가들(Rogue States)'의 미사일 공격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는 미 본토 전역 및 동맹국에 복수의 미사일 기지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어 ABM 조약에 위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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