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롱 팔십'이라는 옛말이 있다. 잔병을 앓느라 몸을 조심조심해서, 오히려 건강하다고 자신해서 무리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보다 더 오래오래 산다는 뜻이다. 또 '아픈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사랑의 열병으로 가슴을 앓지만 그 계기로 많은 생각을 하고 성숙해진다는 뜻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갈등이 드러나서 그 계기로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지혜를 모아서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는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아직 어려서 갈등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우리의 시민사회라야 이제 역사가 십 수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오랜 동안의 군부독재시절동안 반대하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에는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
게다가 정권교체의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진보진영에서의 정부비판과 수구기득권층의 정부비판이 뒤섞여 갈피를 못 잡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으로 반개혁세력들은 수구언론을 중심으로 해서 갈등을 과대포장하고 혼란한 모습으로 유도해서, 개혁이전으로 돌아가자며 안정희구세력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성장하기도 전에 퇴행성을 보이는 것은 병이다. 성장의 번거로움이 싫어서 유아기적 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뒤에는 반드시 아이를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두고 종속시키려는 어른이 있다. 사회에서도 안정희구세력의 뒤에는 여론을 쥐락펴락하려는 수구기득권층이 있다.
며칠 전 독일 에버트재단의 피터 마이어 소장은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 3년 반 동안 있었는데, 한국사람들은 갈등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다."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사회의 주요사안마다 소득수준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이 생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 갈등을 계기로 끊임없이 토론하고 조정을 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사회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해집단의 반대나 갈등이 생기면 그저 호들갑을 떨면서 아무런 대안도 없이 이래서 되겠느냐고 큰소리만 친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국회연설은 실망스러웠다. 국회 제1당인 한나라당은 자신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그동안 각종 개혁정책과 대북정책의 발목만 잡아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건강보험이나 교육정책, 경제정책 모두 국회가 관여된 일들이고, 더구나 국회 제1당으로서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의약분업 시행 시에는 의사들의 파업에 일방적으로 편승하다가 그동안 시민단체에서 의료재정악화에 대해서 열심히 주장할 때에는 관심도 갖지 않더니 이제 와서 엉뚱하게도 의약분업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주장한다.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 무슨 위원회를 만들자는 것이 대안의 전부다. 게다가 뒤로는 사립학교 재단 편을 들면서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현대사태에 대해서도 향후 해외건설의 전망, 실업문제, 경제에 대한 충격정도와 필요자금 규모를 헤아려 비교형량을 해보니 금융지원이 적절했다 부적절했다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조건 공격하고 국정조사를 하자는 것이 고작이다.
야당의 무조건적이고 요란스러운 비판 때문에 정부정책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는 소리들은 가려서 잘 들리지도 않는다.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사회가 아닌 한 사회정책 시행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고도 당연하다. 이 갈등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조정해 나가는 생산적인 토론이 절실하다.
갈등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나서야 할 때다.
이제 분위기나 이미지로 국민을 어떻게 호도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직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야 하고, 분위기 다른 몇 사람을 데려다 덧칠을 해서도 안된다.
보수층이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당당하게 정책을 만들고 설득논리를 세워서 토론에 응하라.
박주현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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