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지가가 문화단체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면서 익명처리를 요구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려는 취지가 아니었다. 사실이 공개되면 '온갖 사람들로부터 쇄도하는 기부 요청에 견딜 수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특히 대기업에는 기부금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무시하기 어려운 인사가 직접 요구하거나, 명분이 뚜렷하면 거절하기도 어렵지만 그 요구를 다 들어주면 기업 운영조차 힘들 지경이라고 하소연한다.
■기부금 요청 중 최고의 압력이 정치헌금을 해달라는 후원회 초청장이다. 힘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언제 곤욕을 치를 지 모른다.
좋은 정치인을 후원하려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후환을 사전에 막으려는 보험 의미가 크다. 국회의원 후원회마다 보도기사에 나오는 참석자 이름과 함박 웃음 짓는 사진은 장래를 위한 영수증인 셈이다.
■지난달 17일 행자부가 입법 예고한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 개정안'에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이 거세다. 기업의 자발적인 기부는 허용하지만 문화예술단체의 기부금품 모집은 금지한다는 조치이다. 각종 행사에 기부금을 요구하는 풍조를 없애려는 준조세 금지 원칙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문화예술인의 반론 제기는 일리가 있다. "자발적인 기부문화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기부금을 요청조차 못하게 한다면 그나마 문화활동을 돕는 쪽박을 깨뜨리는 결과가 된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정치인이 후원금을 모금하는 정치자금법만을 존치시킨 것에 불만이 크다.
■역사지식이 이럴 때 필요하다. 역대 왕조의 문화 융성기는 현명한 군주가 관심을 갖고 국가 재정을 기울일 때 시작했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 전기의 문화발전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근대 서구의 문화발전도 계몽군주와 영주 가문들이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해서 가능했다.
올해 문화예산 1조원 중 순수 문화사업 지원은 200억원에 불과하다. 나라 크기에 비해 매우 적은 액수다. 이번 개정안이 '문화발전 봉쇄책'이 돼 현 정권의 실책으로 거론되지 않기를 바란다.
/최성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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