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 8종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시민단체와 교총, 전교조, 남북한 국회까지 공동대응을 모색하는 등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4일 한국 근세사를 전공한 정옥자 서울대 규장각관장과 '일본 우익연구'를 펴낸 바 있는 이원덕 국민대 정치학과 교수의 대담을 통해 이번 사태의 근본 배경과 일본의 우익화 경향, 향후 대응책 등을 진단한다.
◈ 정옥자 관장= 일본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다른 나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나라이다.
비록 검정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교과서에는 한반도를 '흉기'에 비유했다.
그러나 세계질서 편입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한국과 중국을 침략한 것은 바로 일본이었다. 이번 역사교과서 파동을 보면서 도덕적 기준 없이 경제대국이 됐을 때 얼마나 위험한가를 다시 한번 느꼈다.
◈ 이원덕 교수= 일본의 역사 인식이 오히려 1980년대 이전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1982년 처음으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졌을 때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내 진보세력의 강력한 비판으로 교과서의 우익적 서술은 상당부분 축소됐다.
더욱이 1990년대에는 역사교과서에 '군대위안부'라는 용어가 씌어지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 수준은 점점 높아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번 파동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역사인식 수준은 다시 한번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이러한 열악한 역사인식 수준이 21세기 일본의 국가진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일본이 1980년대 약속했던 근린국가 배려조항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됐고,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의 사과 담화문도 공염불이 됐다.
또한 19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가 합의한 한일파트너십선언도 그 근본정신이 훼손돼 버리고 말았다.
◈ 정= 일본은 최근 10여년 동안의 경기 침체로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 활로를 못 찾던 정치세력이 교과서를 통해 국민의식을 전환시키고 이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려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과거 무력논리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환상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황국사관은 한마디로 영토팽창주의다. 천황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의 주도국이 되겠다는 극우적 발상이 황국사관이 아닌가. 물론 우리나라에도 극우적 발상은 존재하지만 전체 국민으로부터 공감은 못 얻고 있다.
단세포적이고 유아적인 사상이 지식인이나 국민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다르다. 무사 지배기에 길들여졌던, 순종과 복종의 미학이 일본 국민 대다수를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
◈ 이= 오늘 아침 인터넷으로 일본 신문을 검색했는데 매스컴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사설에서조차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야는 분명 편협하고 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역사와 외교 문제를 바라보는 두 나라의 시각이 이처럼 다른가 참담했다.
◈ 정= 역사학자로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와 신라가 일본에 조공했다니. 이는 터무니없는 자기 합리화이자 미화 작업에 불과하다.
이미 일본 사학계에서도 퇴물취급을 받는 임나일본부설을 부활시킨 것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고 왜곡시킨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천박한 역사관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오로지 힘의 관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원초적 파워게임의 논리로만 파악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대화론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왜 철도를 놓고 수력발전소를 지었고 토지조사사업을 했겠는가. 모두 천황 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대륙진출의 유류품에 불과한 근대화를 우리에게 강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지금도 잔존한 식민사관의 극복과 함께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이='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구성 면면을 훑어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한마디로 아마추어 그룹이다.
전통 역사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개 교육학자거나 매스컴 종사자, 역사학 애호가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내셔널리즘의 선전선동을 위한 전위대에 불과하다.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 소속 회원 스스로가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역사는 목적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 정= 일본은 군국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나라이다. 평소 국제협력관계나 보편적 열린 사회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궁극적인 순간에는 모두 군국주의자로 변모한다. 황국사관은 종교이지 학문이 아닌 것이다.
◈ 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군국주의 사상이 일본 내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검정을 통과한 그들의 새 역사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얼마나 채택될 지는 의문스럽다. 10%를 넘지 못할 것이다. 일본 내에도 비판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1990년대 들어 기미가요(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장기) 게양이 법제화했고,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도 공식화했다.
전쟁을 부추기는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善紀)의 만화 '전쟁론'은 수십만 권이 팔렸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인기는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 이후 국제 사회에서 역할을 확대하려는 움직임 또한 거세다.
이번 역사교과서 파동은 이러한 일련의 우경화 현상 속에서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 정=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문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는 어떤 논리에서건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중무장해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정신위생 상으로도 좋지 않다. 그들은 틈만 나면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경계심을 갖되 평화ㆍ문화 논리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 이= 이번 파동을 국가 이익의 갈등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편협된 역사인식과, 보편적이고 범인류적인 역사인식간의 갈등으로 취급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일본에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역사왜곡을 비난하는 양심세력이 있다. 단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 연대만이 실용적이면서도 전략적인 이득을 줄 수 있다.
일본 극우세력에게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 기존 내셔널리즘적 사고방식은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선 검정 통과 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채택되지 않도록 조직적인 국제 연대 운동을 펼쳐야 한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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