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정찰기와 전투기 충돌 사건에 대해 서로 책임을 주장하면서 정 면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상호 책임이 있다고 직접 공방을 벌였다.양국은 외교적 협상 보다는 국가적 자존심을 겨루는 힘의 대결을 불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은 협상을 통한 조기해결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 中 '美정찰기 조사권' 선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이번 충돌 사건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밝힘으로써 사실상 정면 대응을 선언했다.
江 주석의 발언을 전한 주방자오(朱邦造) 외교부 대변인은 시종 미국측 주장을 비꼬면서 "우리는 미국 정찰기를 조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후 줄곧 미국측 반응을 관망해왔던 중국이 이날 강경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만만디 작전'으로만 일관하다가는 미국에 기선을 제압당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때처럼 악화하는 국내의 반미 여론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민족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담담한 어조로 사태를 지켜 봐온 관영 언론들도 향후 강경 보도로 논조를 바꿀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국이 이처럼 강경하게 맞 대응한 것은 이번 사건의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공 침입여부와 충돌의 고의성 여부 등에 대해 논란이 많은 상황이지만, 불시착한 미국 정찰기와 승무원들을 어디까지나 중국이 '통제'하고 있다. 더구나 미군은 사상자가 없는 반면 중국군 전투기는 추락, 현재 조종사가 실종된 상황으로 오히려 피해 당사자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다.
때문에 중국은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이 통제권 카드를 십분 활용, 사과는 물론이고 배상까지 받아낸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사건을 그 동안 열세를 면치 못했던 대미 관계를 만회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한편,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문제 등 다른 현안들과 연계할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정찰기 내부를 조사, 기술과 정보를 입수하겠다고 사실상 공표했다. 朱 대변인은 중국군이 정찰기에 진입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미 정보 확보에 나선 것으로 정보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영국의 군사전문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의 발행인 폴 비버는 "중국이 정찰 정보를 입수, 러시아에 인계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경우 미국은 군사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이 계속 강경하게 미국을 몰아붙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나치게 미국을 곤경에 처하게 할 경우 실익을 얻기는커녕 분쟁의 수위가 원치 않는 정도까지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이동준기자 djlee@hk.co.kr
■ 美'기체·승무원 조기송환'부실
미국이 비상 착륙한 미군 정찰기와 승무원들을 원대 복귀시키기 위해 과연 어떤 카드를 중국에 사용할 지 주목된다.
데니스 블레어 미 태평양군 사령관은 3일 "미국 정찰기는 분명히 중국 영공에서 12마일(19㎞) 밖 공해 상공에 있었다"며 중국 전투기의 추격과 제지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전날 승무원 즉각 송환과 정찰기 반환을 요구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으로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수 밖에 없다. 부시 정부 출범이후 세계전략의 수정에 따른 최대의 외교사건이 벌어진 만큼 호락호락하게 마무리 짓기가 어렵게 돼 있다.
중국이 EP-3가 수집한 자국의 방공망 등의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기체반환을 거부할 경우 미국은 각종 현안에서 강경한 대 중국 압박 카드를 사용할 것으로 여겨진다.
아서 월드론 미국기업연구소(AEI) 아시아 연구소장(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은 2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EP-3의 반환을 둘러싸고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10월로 예정한 부시 대통령의 방중 연기 ▦ 중국 고위 관리들에 대한 비자 발급 정지 ▦대만이 원하는 모든 무기 판매 ▦중국의 올림픽 개최 저지 등 대응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또 경제 압박을 통해 중국의 강경 자세를 완화시키려고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미국의 합의에 따라 연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는 중국에 대해 미국이 'WTO 조기 가입 반대'라는 과감한 포석을 둘 수도 있고, 정ㆍ경 분리 원칙에 따라 빌 클린턴 전 행정부가 통과시켰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를 재검토하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다. 또 무력 시위 등 군사적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일단 외교 협상 등 대화로 현 사태를 해결하되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경우 이 같은 카드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해결 방법과 방향에 따라 부시 행정부가 앞으로 대 중국 정책을 어떻게 추진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사고 미 정찰기 EP-3
'세계의 감시자' '공중 진공청소기'등의 별명이 붙은 미 해군 EP-3 정찰기는 1969년 처음 배치된 후 세계 각지에서 각종 군사 정보를 수집해왔다.
중국 전투기와 충돌 사건이 발생한 1일에도 EP-3기는 국가안보국(NSA)의 3군 합동작전에 따라 중국 해군 보유 선박의 종류와 숫자, 작전 패턴, 병참 조직 등과 하이난(海南)섬 주변의 중국군의 통신 도청과 방공망 정찰을 실시했다.
EP-3기는 최근 중국의 미사일 배치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대만 해협과 해저유전으로 영유권 분쟁에 휘말린 난샤(南沙) 및 시샤(西沙) 군도 등의 중국군 움직임을 집중 감시했었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밝혔다.
미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EP-3기는 모두 12대로 시애틀의 위드비 해군기지와 스페인 로타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2개 편대로 운영되고 있다. 위드비 해군기지 소속인 이번 사고기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파견돼 정찰 임무를 수행해왔다.
4개의 프로펠러를 달고 있는 EP-3기는 재급유 없이 12시간, 5,500㎞ 를 비행할 수 있으며, 적국 영토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전자신호를 탐지, 녹음ㆍ분석할 수 있는 무선 수신기 및 고성능 접시안테나 등 최첨단 군사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또 비행 중에도 미군의 군함과 항공기에 수집 정보를 직접 보내는 등 실시간 첩보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EP-3기의 탑승 인원은 24명으로 소속은 해군 22명, 해병대와 공군이 각각 1명씩 이다. 이들은 모두 정보 전문가들로 이중 8명은 암호 해독 전문가들이다. 이번 사고기에는 3명의 여군도 탑승하고 있었다.
EP-3기의 최첨단 장비와 정보 능력 때문에 유사시 승무원들은 탑재 장비와 기밀을 파괴하도록 특수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기도 비상 착륙 때 승무원들이 장비 등의 파괴를 시도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완전 파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 중국군 관계자들이 이미 정찰기에 들어갔다는 일부 보도도 나오고 있어 미국을 초조하게 하고 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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