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죄송합니다. 다시 하지요."2일 오후 2시40분 KBS 본관 스튜디오에선 14일 방송될 '태조 왕건' 의 109회분 녹화 현장에서 종간 역을 맡은 김갑수가 연속 NG를 냈다. 한쪽에서는 왕건 역의 최수종과 궁예 역의 김영철이 열심히 대사를 외우고 있다.
"양호한 편이지요. 극본이 2주전에 나와 녹화를 할 수 있으니까요. 웬만한 드라마는 당일 쪽극본(1회분 중 일부분만 나오는 대본)을 가지고 녹화에 들어갑니다." 최수종의 말이다.
김혜리(연화 역)가 한마디 거든다. "한국 탤런트들은 임기응변의 천재들이지요. 촬영 당일 극본을 받고도 연기를 잘 하니까요."
방송 3사의 미니 시리즈나 일일 드라마는 방송 시간에 임박해 초읽기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연기자는 당일 쪽대본을 받아 들고 캐릭터의 분위기를 파악하기는 커녕 연기를 하느라 급급하다.
한 PD가 늘어놓는 "방송 두시간 전에 녹화 테이프가 편집실에 전달돼 방송 10여 분전에 편집을 마쳐 방송에 내보냈다"는 영웅담이 방송 사고가 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말로 들린다.
촉박한 일정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풍토와 분위기는 연기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시청자에 대한 부실한 프로그램 서비스로 이어진다. 드라마에서 웬만큼 인기를 얻은 탤런트들이 충분한 시간과 제작 환경이 보장된 영화계로 진출해 브라운관으로 복귀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NHK 일본 미니시리즈 '다시 한번 키스' 에 출연한 윤손하는 우리와 일본방송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극본이 당일 나오는 경우는 상상도 못해요.
드라마 촬영 몇개월 전에 드라마 전회분 극본이 나와 촬영을 모두 마친 다음 방송을 하니 연기자가 충분히 캐릭터와 분위기를 파악하고 완성도 높은 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미니시리즈는 모두 사전전작제이다. 대하사극은 1년전에 촬영을 끝내는 경우도 많다.
우리 방송도 기회만 있으면 사전 전작제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언제나 공염불이다. 인력과 재원, 기자재의 부족을 이유로 들지만 거기에는 방송사의 얄팍한 상술이 숨어 있다.
시청자의 반응을 보면서 내용을 변경하거나 횟수를 조정하려는 것이다. 인기가 있으면 늘리고, 없으면 빨리 막을 내린다. 2주 전에 대본을 받고 좋아하는 연기자들의 모습. 바로 우리의 열악한 방송 환경의 현주소인 셈이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